디자인과 기술(Design & Technology)
영국은 그야말로 디자인 강국입니다. 아이팟을 디자인한 애플의 조너선 아이브, 크리스찬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를 지낸 존 갈리아노, 지방시의 알렉산더 맥퀸 등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즐비하지요. 그렇다면 영국이 훌륭한 디자이너를 많이 배출할 수 있었던 것은 디자인 교육 때문일까요? 사실 영국이 디자인 교육을 교육정책의 핵심 교과목으로 선정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2001년 영국은 디자이너를 위한 디자인 교육이 아닌 보통 교육으로서의 디자인 교육을 국가의 핵심 교과목으로 선정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2년부터 3년 동안 ‘디자이너를 학교로 Designer into School Week’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1,000명이 넘는 디자이너를 전국 400여 개의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일주일간 파견했습니다. 학교에서 각 분야의 디자이너를 만나게 된 학생들은 이를 통해 디자인에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지요. 영국의 움직임에 자극을 받은 유럽의 주요 선진국들도 뒤질세라 디자인 교육을 청소년 교육과정에 도입했고, 미국 역시 디자인 교육에 투자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2009년부터 그동안의 디자인 교육을 크게 개선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각 학교의 교육과정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영국 교육기관의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영국의 청소년들은 실생활과 다소 동떨어져 보이던 디자인이라는 분야와 친숙해졌지요. 그럼 영국의 청소년들은 어떻게 디자인 공부를 하는지 잠깐 들여다볼까요? 영국 초·중등 교육과정의 디자인 교과목 이름은 ‘디자인과 기술(Design & Technology)’입니다. 줄여서 ‘D&T’라고 쓰기도 하지요. 영국은 디자인 교육을 시행하면서 청소년들이 다음 6가지 분야의 능력을 키울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① 디자인 능력과 만드는 기술을 발전시킴
② 디자인을 이해하고 지식을 발전시킴
③ 새로운 기능의 제품을 개발하고 결합할 수 있는 능력을 발전시킴
④ 디자인과 만들기를 통해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능력을 발전시킴
⑤ 디자인되어 만들어진 것을 생활 속에서 어떻게 사용하는지 이해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상하는 능력을 발전시킴
⑥ 디자인과 기술 프로세스가 우리 사회에 어떻게 이바지하고 있는지 탐구하고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을 발전시킴
와! 정말 대단해 보이지 않나요? 이 목표에 따르면 영국의 청소년들은 무언가를 직접 디자인한 뒤 그것을 구체적인 물건으로 만들어 내고, 나아가 그렇게 만들어진 물건이 우리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연구해야 합니다. 이쯤 되면 전문 디자인 교육과도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좀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 보면 더욱 놀랍습니다. 중학교 과정에서는 학기마다 모형(Product Making)을 만들어야 합니다. 보통 시디꽂이나 시계처럼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품 위주로 주제가 주어지면 학생들은 그런 물건들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미한 제품을 디자인하여 모형까지 만들게 되지요.
이 수업은 프로젝트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이는 한 기업체의 개발 부서에 속한 직장인들이 하나의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는 과정과 거의 흡사합니다. 영국 디자인 교육의 뛰어난 점은 또 있습니다. 교사가 단순히 학생들이 만들어 낸 결과물만 보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물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전 과정을 평가한다는 사실이지요. 학생들은 최종적인 모형, 즉 결과물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자신이 왜 이런 물건을 만들게 되었으며 원래의 제품에 담긴 정체성은 무엇인지, 어디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으며 앞으로 이 아이디어를 다른 분야에 어떻게 응용할 수 있는지, 스스로 생각할 때 최종 결과물에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는지 등을 발표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발표를 준비하고 물건을 만드는 과정을 통해 머릿속의 생각을 그림으로 구현하는 드로잉 기술을 익히고 물건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정리하는 포트폴리오 작성법을 배우며,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프레젠테이션 방법까지 습득하게 됩니다. 이는 영국 디자인 교육의 목적이 아이들을 단순히 손기술 좋은 사람으로 키우려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획, 경영, 행정, 기술, 탐구, 발표, 청취 능력을 두루 갖춘 인재로 키우려는 데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해서 영국은 앞서 언급한 다방면의 능력을 고르게 발달시킬 수 있는 최적의 교육을 디자인 교육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1년 동안 디자인 교육을 받은 뒤에는 그동안 물건을 만들면서 다루었던 재료와 공구 활용법, 기술에 관한 이론 시험을 치릅니다. 이 단계만 통과해도 기본적으로 일상생활에서 가구를 조립하거나 고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게 되는 겁니다. 가족을 위해 그네를 만들거나 정원에 울타리를 치는 일, 또는 애완견을 위해 예쁜 개집을 만드는 일 정도는 직접 할 수 있게 되는 거지요. 예로부터 서구의 훌륭한 위인들은 모두 훌륭한 목수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망치질을 하고 톱질을 하면서 노동의 가치를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직접 무언가를 만들어 냄으로써 머릿속의 생각을 구체적인 결과물로 변화시키는 공부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서구의 디자인 교육은 어쩌면 수백 년 전에 시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영국의 중학교에서 <디자인과 기술>은 선택 과목이지만 영국 교육 당국이 핵심 교과로 표방한 만큼 이 과목을 선택하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중학교에서 성적이 좋은 학생들은 고등학교 과정의 <디자인과 기술> A레벨에 지원하게 됩니다. 고등학교 과정부터는 중학교 때보다 훨씬 어려운 수업이 진행됩니다. 만들어야 하는 모형의 개수도 늘어나고, 디자인과 관련된 컴퓨터 프로그램을 다루는 법도 익혀야 합니다.
디자인 계통을 전공하는 우리나라 대학 초년생 과정이 영국에서는 고등학교 때부터, 그것도 디자인 전문 교육기관이 아닌 일반 학교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지금 우리가 영국 고등학교의 디자인 교육과정까지 세세하게 알 필요는 없습니다. 주목할 점은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선진국으로 꼽히는 영국과 미국이 디자인 교육에 매달리고 있는 이유입니다. 영국의 디자인 교육 현장을 목격한 우리나라 언론사의 한 기자는 이런 기사를 썼습니다.
'영국이 이토록 디자인 교육에 매달리는 이유는 바로 ‘디자인식 사고를 창의성 발현의 출발점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영국의 디자인 교육은 비단 디자이너들을 양성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영국의 미래 인재들이 한 인간으로서 창조적인 사고를 키우고, 예리한 관찰력을 기르게 하기 위한 것. 이것이 바로 영국 디자인 교육의 최종 목표다.' 2007년 10월 5일 <△△일보>
위 기사에서 디자인식 사고라는 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뜻할까요? 그리고 디자인 교육을 받으면 과연 사고력과 관찰력이 향상되어 창조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이러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디자인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겠지요?
사진_영국 Oakham School 디자인 수업
ham School
mookss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