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감각

소설적 순간, 셋.

by mooleun

촛불이 타고 있다. 마주 보는 두 개의 창, 불어오는 맞바람에 삐그덕 소리를 내며 반쯤 내려진 블라인드가 흔들린다. 블라인드의 방향으로 바람의 방향을 유추한다. 얇은 날개들이 조금씩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바람의 방향이 보이는 것 같다. 저쪽에서 들어와 이쪽으로 빠져나가는 길.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린다. 신발 밑창을 끌며 걷는 소리다. 누군가 발을 들어 걷지 않고, 모래가 듬성듬성 깔린 오래된 길을 문지르듯 앞으로 나아간다. 바람에는 소리가 있다. 어느 날은 적막과 한기가 스민 바다의 파도 소리 같고, 다른 날은 왁자한 여름날 공원 속 나뭇가지들이 뒤엉켜 춤을 추는 소리 같다.

오늘의 바람은 삐그덕거리는 낡은 집의 바닥에 발을 내디딜 때마다 내는 소리 같다. 거슬리다가도, 오래된 풍경 속에 들어가 있는 듯 익숙해지는 소리다. 불편하지만 낯설지 않은 소리.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어릴 적 어디선가 들어본 소리.


민트색으로 페인트칠된 그네 벤치가 있다. 나는 그것을 흔들의자라고 부른다. 몇 해 동안 비와 눈을 그대로 맞은 철제 의자는 군데군데 녹이 슬어 있었다. 그 녹을 보고 있으면 이것이 한때 뜨겁게 달궈졌다가 식은 금속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겨울날 그 위에 앉으려면 늘 큰 결심이 필요하다. 시린 바닥에 엉덩이를 대려 하면 온몸이 움츠러드는 기분이기 때문이다.


그날은 예년보다 온화한 날씨라 했다. 미세 먼지가 걷혀 태양빛이 온전히 내려앉아 있었다. 그렇기에 주저 없이 흔들의자에 앉았다. 발을 차며 의자를 움직이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정면으로 능선이 보였다. 겨울의 산은 가까이 보면 메말라 있지만, 멀리서 보면 오히려 친근하게 느껴진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면 농막이 보였다. 시선을 좀 더 아래로 당기니 도로와 작은 다리가 보였다. 그리고 더 아래에는 아랫집과 너른 밭이 보였다. 내 눈은 마치 카메라 렌즈처럼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했다. 줌아웃하면 산이 있었고, 줌인하면 밭과 발아래 언덕이 보였다. 리듬은 나의 발이 만들어냈다. 발이 바닥을 밀 때마다 풍경은 멀어졌고, 흔들의자가 되돌아올 때마다 다시 가까워졌다. 머리 위 태양은 모든 풍경에 같은 빛을 올려놓고 있었고, 불규칙적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그 사이에 작은 흔들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풍경이 만들어지는 속도를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발끝의 힘 하나로 바뀌는 것들. 어느 날 피워둔 향초가 떠올랐다. 바람에 흔들리던 불 빛과 불 빛이 흔들릴 때마다 뒤틀렸던 방안의 풍경.


평온한 어느 날이었다. 평온하다는 건 어쩌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사소한 것들이 소소하게 움직이는, 그래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잊고 있었지만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그 무언가를 다시 보는 기분처럼.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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