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적 순간, 넷.
<신호>
창밖에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건물이 보인다. 건물 중간 즈음에 빨간 불빛과 파란 불빛이 밤새 켜져 있다. 바라보고 있자면 의뭉스러운 느낌이다. 비밀스러운 신호를 어딘가로 보내고 있는 건 아닌지 상상한다.
주택과 논, 비닐하우스를 집어삼키기 위해 보초를 서는 괴물같이. 거대한 미래에서 온 것 같은 건물이다. 신도시 속 듬성듬성 개발되지 못한 채 존재하는 낡은 가옥들과는 다른 결이다. 포악하지만 웅장하다. 우연히 그 앞을 지났다. '물류창고 저온/상온' 현수막이 걸려있다. '임대'라는 또 다른 현수막도 함께다.
<조양 방직>
조양 방직. 옛 방직 공장에 자리 잡은 그 세월을 온전히 품고 있는 강화의 한 카페 박물관. 주차장으로 가는 길은 그 터 주변으로 차갑고 감정 없는 철판이 세로로 꽂혀 감이 되어 있었다. 그 철담을 넘어 겨울의 가지가 삐죽 새어 나오고 있었다. 까치발을 들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다른 세계였다. 마녀가 살고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니 무섭다고 답해왔다.
화살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19세기 영국 오르골 피아노, 옛 탤런트와 모델들의 색 바랜 사진과 누군가의 그림들. 누구의 어떤 그림인지도 모르지만, 그 안에 존재한다는 이유로 가치를 환산할 수 없는 명화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낡은 이발소 의자들이 산발적으로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디서 온 것인지 모를 회전목마들이 아이들의 거침없는 손길을 피로한 모습으로 감내하는 장면도 봐야 했다. 유년 시절, 100원 동전을 들고 찾았던 칠이 벗겨진, 이제는 찾기 힘든 공중전화도 보였다. 누군가 말했다.
"우리는 그때 누구에게 전화를 걸었던가. 어떤 대화들이 오 갔을까."
녹슨 계단에는 어린이는 올라갈 수 없다는 경고 문구가 적혀있다. 아이는 올라갈 수 없는 계단을 발견할 때마다 탄식해야 했다. 이제는 한 대만 남은 그 시절의 방직기가 출구 앞에 외롭게 존재하고 있었다. 1930년대의 것이었다.
여기가 방직 공장이었다고 1인 시위를 하다 체념한 듯, 낡고 방치되어 풀 죽어 있는 모습이다.
<학교>
학교를 드나들던 문은 후문이었다. 그곳이 정문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후문을 지나 반듯이 걸어가면 사육장이 나왔다. 원형으로 되어 고깔 모양의 철망이 지붕이었던 곳. 그 안에는 공작새와 토끼, 다른 동물들이 어슬렁거리며 무료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 분꽃과 사루비아가 심어져 있었다. 삼사 오오 사루비아 꽃을 따 꿀을 빨아먹을 때면 달다 말하고 신기해했다. 우리의 눈은 반짝였다. 어느 날은 봉숭아꽃을 선생님과 수위 아저씨 눈을 피해 따서 집으로 가, 천장 혹은 싱크대 어딘가에 있던 붕산을 덜어 마늘 절구에 넣고 빻은 뒤 손톱 위에 한 무더기씩 올려놓은 적도 있다. 그러면 손톱뿐 아니라 손가락 한 마디에 주황색 물이 잔뜩 들어 있었다. 김치 국물에 절여진 모양으로 보이기도 했다.
운동장으로 달려 정글 짐으로 올라타며 술래잡기를 하기도 했다. 구름다리, 철봉, 어느 아이는 구름다리에서 떨어져 모래를 붉게 물들였고, 다른 아이는 성룡의 영화를 보았다 했다. 5층짜리 정글 짐의 3층 한 칸에서 창문을 깨고 탈출하는 장면을 따라 한다며 제 몸을 그 네모진 구멍 안으로 던졌다가 턱이 깨졌다.
철봉을 사이에 두고 계절의 차이를 둔 두 아이가 다쳤지만, 졸업할 때까지도 운동장의 기구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요즘 학교에서 사라진 것들이 많다는 사실을 들었다. 안전과 아이들의 정서적 무언가를 위한 어른들의 결정. 보호를 위한 조치가 왜인지 쌉싸름한 것은 내가 가졌던 추억이 꽤 낭만적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논두렁>
마른 논두렁 길 위로 네 명, 아니 다섯 명의 아이가 일렬로 걸어간다. 울퉁불퉁 눈이 왔다 녹아 질펀해졌다가 얼어버린 길이다. 각자 막대기나 지푸라기를 들고 휘적휘적 공중에 손을 흔들며 걸어간다. 네 번째에 걸어가고 있는 가장 작은 아이는 총총 걸으며 속도를 맞추려 애를 쓴다. 그 뒤의 여자아이는 되레 작은 아이의 속도를 맞추기 위해 어기적거리며 걷는다.
선두에 서 있던 남자아이가 논두렁 길 밑으로 미끄러지듯 내려간다. 모두가 다 같이 녀석을 따라 밑으로 내려간다. 하나같이 흙투성이다. 마지막에 걷던 여자아이가 작은 아이보다 먼저 내려가 손을 내민다.
겨울잠을 잘 장소를 잘못 고른 것인지, 일찍 깨어난 것인지. 개구리 한 마리가 어리둥절한 채 다섯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 검은 몸에 빨간 점이 있는 개구리였다. 선두였던 녀석이 소리친다. "독 개구리다!" 아이들이 혼비백산해 논두렁을 기어 올라간다. 다섯 번째에 서있던 여자아이가 작은 아이를 먼저 올린다. 작은 아이가 빨리 올라오라며 발을 동동 구르고, 아직 기어오르지 못한 여자아이를 바라본다. 눈에 눈물이 맺혀 있다. 다른 아이들은 달음박질로 논의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발이 미끄러져 조금 늦게 올라온 여자아이가 작은 아이의 손을 잡기 위해 제 옷에 손을 툭툭 턴다. 나란히 손을 잡고 걸어간다. 마지막으로 올라온 아이가 말한다. "독이 있어도 안 만지면 상관없어." 덤덤하게 말하며 뒤를 돌아보다가 작은 아이의 손을 꽉 움켜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