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적 순간, 다섯.
<그들의 대화>
"왜 나를 바로 낳지 않았어?" 아이가 엄마에게 물었다. "왜 엄마랑 아빠 둘이서만 7년 동안 놀았어?" 재차 물었다. 엄마는 아이가 사랑스러운 듯, 조금은 억울한 표정으로 눈꼬리를 밑으로 내리면서 입술을 조금 앞으로 모아 내밀었다. "엄마도 기다렸지. 너야말로 빨리 오지 그랬어. 얼마나 기다렸는데!" 명랑하게 허리 양옆으로 손을 얹으며 씩씩거린다. 행복한 장난기가 서려있다.
<뒷마당 앵두나무>
할머니 댁 뒷마당에는 수돗가가 있었다. 아버지가 바른 시멘트는 올곧지 않아 패인 곳에 물이 오래도록 고여 있었다. 수도꼭지 아래 놓여 있던 빨간 고무 대야는 낡은 생채기를 품은 채 물을 받아 두고 오랫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후텁한 청록의 이른 아침이면 대야바닥 아래에는 청개구리 한두 마리가 작은 몸을 웅크리고 있기도 했다.
담 아래 수돗가는 꽤나 넓은 품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가끔은 더 길고 깊은 빨간 대야를 두고 세 여자가 김치 속을 섞기도 했다. 뒷마당의 정중앙에는 턱이 살짝 올라간 정사각형의 공간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장독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장독대 옆에는 닭장 있었다. 닭장은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얽힌 철장으로 막여 있었다. 어린 시절 짓궂은 아이가 메뚜기나 방아깨비를 잡아 다이아몬드 틈으로 집어넣기도 했다. 그렇게 토실토실해진 닭이 없어지고 영원히 닭장이 비워진 어느 날, 짓궂은 아이는 밥상 앞에서 울었다.
뒷마당으로 나가려면 초록 철문을 지나야 했다. 녹이 슨 곳이 짙은 갈색으로 초록을 벗겨낸 채 날카롭게 위협하는 문이었다. 사자의 얼굴을 한 손잡이에는 쇠코뚜레 같은 고리가 걸려 있었다. 어느 날, 방문한 곳에서 같은 문을 발견했을 때 문득 할머니 댁 뒷마당이 떠올랐다.
이 문 옆에는 앵두나무 한 구루가 있었다. 가지치기를 하지 않아 무성한 나뭇잎들 사이사이에는 진딧물이나 작은 벌레들이 기어다녔다. 농약도 치지 않은 자연 그대로, 어쩌면 방치된 앵두나무에서 빨갛고 동그란, 입에 넣으면 시큼하고 새콤하면서 달콤하게 퍼지던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다.
그 모습은 마치 빨갛고 반짝이는 동그란 비즈로 꾸민 장식 같아 보이기도 했다. 모든 것이 허물어져야 했을 때, 감나무며 포도나무는 옮기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왜 그 앵두나무는 아무도 챙기지 않았을까. 스테인리스 국그릇에 한가득 따 와 지하수라 사시사철 냉수였던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에 씻어 벌레들을 버려내고 먹던 그 앵두의 맛이 그립다.
<섬>
섬 군데군데 있던 작은 만, 가늘고 고운 모래사장. 바다는 언제나 반가웠기에 단숨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언덕에 자빠질 뻔한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아이들이 달린다. 언덕 아래로 홀로 조심스레 내려와 걱정 어린 눈으로 뒤를 돌아보던 아이 하나. 고개를 돌려 바라본 아이의 눈에 낮은 둔덕 위에 서 있는 어른들이 있다.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저 먼바다 어느 한 점을 바라보는 듯하다. 바람이 가로 분다. 그들의 머리가 가로 흩날린다. 각자 뭐라 말하는데 아이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뒤에서 뛰놀던 아이들이 부른다. 아이는 안심한 듯 미소를 품고 달린다. 바닥이 폭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