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완연한 엄마 생활의 시작
우리를 소개하는 말을 적고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일을 저지른 사람이 먼저 나서는 게 맞는 것 같아 이렇게 무턱대고 인사를 건넵니다. 안녕하세요. '물풀'이라고 해요. 제주에 사는 엄마들의 글쓰고 책내기 프로젝트를 벌인 사람이고요. 그러니까 시작은 어디였을까요. 그 누구도 아닌 '나'를 또렷하게 나타내는 글을 꼭 한번 쓰고 싶었어요.
막연했습니다. 닦아야 할 그릇과 정돈되지 않은 블록이 넘치는 강물에 빠진 채로 몇 년을 살았더니 말이죠. 발버둥 치다 보면 해가 지고 진이 다 빠졌어요. 어쩌다 고개를 내밀고 뻐끔뻐끔 숨을 쉬면 다행이었고요. 물에 빠진 내 손을 놓친 적은 없어요. 아이는 생각보다 빨리 자라고, 늦기 전에 나를 되찾고 싶었거든요. 따뜻한 바람을 쐬어주고 보드랍게 쓰다듬어 주면서요. 매일 하는 기도처럼 내게 새겨 넣은 말을 기억해요.
언젠간 건져내야지, 내가 나를 구할 거야.
마음을 함께 길어 올릴 조력자들이 필요했어요. 각자의 책상에 앉아 자신을 위해 낮과 밤을 보낼 이들, 자세히 들여다보고 손대 보면 결이 비슷한 사람들,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는 모습들. 총총총 움직이게 해 줄 마감은 물론이고요. 홀린 듯 써 내려간 글을 올리고, 5만 원을 들여 SNS에 광고를 내기에 이르렀습니다.
기획 의도
새카맣게 그을린 피부, 성큼성큼 현무암 덩이를 건너는 저 용맹함, 더는 나아갈 곳 없어도 파도라도 건너겠다는 천진한 의지. 아이들은 걱정과 달리 잘도 자라납니다. 섬 곳곳의 들판과 파도와 바람이 힘을 합쳐 아이를 키워내지요. 글로 뭉친 제주 엄마들(그녀들을 통틀어 ‘J’라 부르려 한다)이 각자가 지나고 있는 육아 시절을 슬며시 들춰보려 합니다. 버티다 먼저 튕겨 나갈 것 같던 영유아기를 지나 이제 숨 좀 돌리고 살만해진 J. 각자의 이유로 섬에 들어와 아이를 키우며 사는 것 외에 특별한 공통점은 없어요. 누구나 마음속에 돌 하나씩 얹고 산다 했던가요. 기어이 섬까지 꽁꽁 싸매고 온 돌덩이 하나를 이곳에 내려놓겠다는 마음이 닮았는지도 모르겠네요. 그 돌덩이를 이제야 화석처럼 새겨 넣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빛나는 섬 제주에서 자라나는 아이들 보며 우리도 자라날 용기를 내어 보아요.
활동 및 목표
한 편의 단행본 에세이집을 완성하고자 합니다. 공통의 주제는 ‘제주에서 살고 육아하며 겪은 이야기, 떠오른 생각, 토하고 싶어 미치겠는 말들’입니다. 슬픔이 있다면 그것에 관해 이야기하며 견뎌보려 하고, 기쁨이 지나간다면 덜컥 붙잡아 함께 누리며 충만해지고자 합니다.
지원 자격
현재 제주 거주 및 육아 경력 만 1년 이상인 여성으로,
- 글쓰기를 좋아하거나 속마음을 글로 표현하길 마음속 깊이 갈망해온 분.
- 주 1회 한 편 이상의 글을 쓰고, 팀원들의 글을 함께 읽고 고치는 지난한 과정을 함께 하실 수 있는 분.
'좋아요'는 빠르게 늘어났지만, 문의나 신청은 아예 없었어요. 이렇게 끝인가, 하는 생각과는 달리 손가락은 자꾸만 메일함 새로고침을 눌러댈 뿐이었고요. 오른 손 반복 노동의 갸륵함을 알아준다는 듯, 마감일이 가까워오자 십 여 통의 지원서가 도착했어요. 이게 뭐라고. 아니, 내가 뭐라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 글을 쓰고 싶다 했을까, 벅차올랐습니다.
낯선 사람 넷이 만나는 장소를 정하는 건 '공평한 거리감'이 예의일 것 같아서, 각자 사는 곳에서 선을 그어 가운데 지점을 찾았더니 서귀포시 안덕면 어드매더라고요. 사계리에 있는 한 공유오피스에서 첫 모임을 가지기로 했습니다. 하루치 이용료를 내면 와이파이, 업무용 테이블, 휴게실, 미팅룸을 이용할 수 있고 커피와 토스트도 무제한 제공하니 딱 좋았어요.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에 아이들을 데려다주고(제주는 버스나 도보 보다는 차로 등교 또는 등원해야하는 경우가 많아요) 모이면 아침 9시 30분. 각자가 쓴 글을 가지고 와서 입으로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은 일주일에 한 번, 목요일로 정했어요. 'I(내향형)'가 3명이라 '파워 E'인 막내 히뽀가 늦으면 늘 어색함 세 스푼 정도 넣고 시작했어요. 정중하고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면 쭈뼛쭈뼛 커피 스테이션으로 갑니다.
- 완엄생 모임 매뉴얼
1. 죽은 빵도 살려낸다는 발뮤다토스터기에 식빵 두 조각을 올려놓고 3분 동안 굽는다.
2. 진한 커피를 내리고 파란 피넛버터 뚜껑을 연다. (원한다면 뉴텔라 씨도 함께 해요.)
3. 알맞은 온도로 익은 바삭한 토스트 위에 빈틈없이 피넛버터를 바르고 취향 껏 딸기잼을 뿌려 자리로 돌아간다.
4. 프린트 해 온 각자의 글을 나누어주고 입으로 본인의 글을 소리내어 읽는다(으악).
5. 글에 대해, 지나간 일들과 숨겨두었던 마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가 정기적으로 피넛버터를 듬뿍 바른 하얀 식빵을 먹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어요. 일종의 우리만의 비밀스러운 워밍업, 그러니까 '리츄얼' 같은 거랄까. 정말 맛있었고요(그 무서운 '아는 맛'). 맛있는 건 어색함을 내쫓으니까요. 달콤한 지방과 당이 만나 이루어내는 꾸덕한 죄책감은 여럿이 같이 하면 사르르 사라져요.
참 이상한 일이에요.
아무 상관 없이 살아 온 네 명이 데려온 시절들은 실타래처럼 얽히고 섥혀 더는 떨어지지 않고 지면을 맴돕니다. 지금 와서 이야기한다 해도 아무 소용 없는 일들, 한번쯤 고백해보고 싶었던 말, 일기에 조차 남기지 못한 마음을 용기내어 꺼내 보았습니다. 무엇을 증명하고 싶었던 건진 모르겠지만, 이로써 우린 새로운 우주를 맞이합니다. 서로를 모르던 그때처럼 각자의 삶으로 다시 흩어졌어요. 어딘가로 나아가기 시작했다는 말이 잘 어울리겠네요. 더는 피넛버터를 정기적으로 먹진 않고요(맞죠?).
J, 완연한 엄마 생활을 시작합니다.
제주에서 글 쓰는 네 명의 J
- 물풀: 글 쓰는 밖순이 엄마
- 미오: 예술하는 엄마
- 하다: 그림 가르치는 엄마
- 히뽀: 철없는 N잡러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