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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풀 Jan 12. 2023

울고 싶을 땐 대형마트로 간다

미안하다는 말로 퉁칠 순 없어

중산간에 펼쳐진 드넓은 벌판도 옥빛 잔잔한 바닷가도 아닌, 이 섬에서 가장 커다란 마트에 나를 가져다 놓는다. 스피커폰으로 요란했던 통화를 마치고 고요한 하이브리드 차 내부에 앉아 있는 건 고역이라 차를 몰았다. 와이퍼로 몇 번을 쓸어도 센 바람에 튕겨 나온 바닷물이 앞유리창을 적셨다. 설핏 보면 비 같았다. 말 줄임표처럼 힘없이 흘러나오는 노래 가사에 ‘멍든 자국’이란 단어가 들어있었다. 자연도 위로를 주지 못하는 날. 아니, 자연이 무심하게 느껴지는 날. 무력한 나를 무력한 채 둘 수 있는 곳은 대형마트 말고는 없다. 지하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 바로 앞 명당자리가 단번에 나서 주차에 골인했다. 전혀 기쁘지 않았다. 주차하고 시동을 끈 뒤 볼일을 보고 시동을 다시 켜듯이, 그저 다시 태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쇼핑 카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바퀴가 헛돌았다. 마음에 드는 볼펜도 없었다. 얇은 심으로 된 섬세하고 쨍한 색을 고르고 싶은데 검은색뿐이라 그거라도 잡아 들었다. 0.3mm의 견고한 볼펜 심에 기댈 수 있는 마음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볼펜을 고르는 동시에 소리 내지 않고 울었다. 뚝뚝 떨어진 눈물은 새하얀 바닥에서 누군가의 발에 밟혀 사라졌다.     

내가 어렸을 땐 손 놓고 있었으면서, 손주가 울자 나를 나무라며 어쩔 줄을 몰라서 달래는 데에 급급한 모습이 보기 싫었다.

오늘 나의 색은 멍투성이다. 이리저리 색을 섞어봤지만 실패다.


1985년 2월. 나는 태어나 울었다.
1986년 1월의 엄마는 ‘그이(아빠) 입맛에 맞는 반찬을 해내는 것, 아기(나)와 하루 종일 잘 놀아주기, 집 깨끗이 하고 꾸미기’를 다 하지 못했다며 반성했다.
1995년 어느 날, 나는 운이 좋지 않았던 날에 대해 꾸역꾸역 일기를 썼으나,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는 적지 않았다.
2022년 초등학생이 된 내 아이는 오늘 운이 좋지 않았으니, 내일은 운이 좋을 거라고 말하며 창밖을 바라본다.




월요일 아침이면 전화가 울린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혼자 차에 있을 즈음이다. 서울에 있는 엄마와 제주에 있는 나는 전파를 타고 이야기를 나눈다. 아니, 말을 팔처럼 휘두른다. 힘껏 휘두른 팔을 피하고 쳐내고, 또 그러다 한쪽이 빠져 죽을 것 같을 때쯤엔 팔을 뻗어 건져내준다. 깊은 바다를 건너 서로를 만나는 일은 순탄치 않다.


지난 몇 달 동안 월요일마다 묵힌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울며 화냈다. 통화는 비슷한 패턴으로 이어졌다. '잘 지내니?', 혹은 '별일 없니?'로 시작해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길래'를 거쳤다가, '생각해보니 너한텐 정말 미안하다.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딸한테 말하지 누구한테 말해.'라는 말에 죄책감과 낙담이 섞인 묘한 감정을 느꼈다가, '그래도 네 동생이 칠삭둥이로 태어나서 이렇게 건강하게 큰 건 정말 기적이지. 엄마한텐 아픈 손가락이야. 그러니까 건강하게 태어난 네가 이해해줘.'라는 말을 들을 땐 진절머리가 났다. 대체적으로 나는 괴성을 지르며 울었고, 엄마는 침착했다. 딸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뱉어낸 날 선 말과 낡은 원망에도 한숨 한 번 쉬지 않았다.


한 시간이 다 되도록 진이 빠지는 헤엄을 치다가 '그래도 딸이랑 너희 가족 셋이 마음 편히, 잘 사는 게 최고지. 잘 챙겨 먹고, 잘 지내.'라는 찜찜한 인사말이 나올 때 즈음이면 잔뜩 긴장했던 신경에 힘을 푼다. 뭍에 가까워졌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이제 전화를 끊고 깊은숨을 내쉴 수 있다. 빨간색 종료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엄마는 서울로, 나는 제주로 일순간 흩어진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빠져 죽을 것 같아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일단 기어 나온다. 쏟아낸 말들은 말끔히 건져낼 수 없다. 찜찜하게 떠다니는 부유물처럼 둘 사이를 드나들 것이다.


네가 정말 힘들었겠구나.
그때는 나도 엄마가 처음이라 그랬지.
미안하다.


이런 말을 들어도 치유되는 지점에 도달하지 못했다. 드라마 마지막 회처럼 극적인 화해는 없었다. 미안하다는 한마디로 ‘퉁’ 칠 순 없다는 심정이 앞섰다.


걷다가 바라본 풍경, 관곶


언젠가 아이가 끝이 없는 것처럼 울 때 옆에 있던 엄마가 그랬다. 너도 저렇게 가끔 너무 많이 울었다고. 그럴 땐 어떻게 했냐고 묻자, ‘어쩌긴, 그땐 지쳐서 그칠 때까지 놔뒀지.’ 했다. 솔직히 서운했다. 내가 어렸을 땐 손 놓고 있었으면서, 손주가 울자 나를 나무라며 어쩔 줄을 몰라서 달래는 데에 급급한 모습이 보기 싫었다.


치유하지 못한 말들이 이리저리 흩어진다. '애교 없이 쌀쌀맞은 계집애', '어디 한번 너 같은 자식 낳아 키워 봐라.', '엄마니까 당연한 거지.', '아빠처럼 예민한 사람이랑 결혼 안 한다더니, 아빠보다 더 예민한 남자 만나서 결혼했네, 고소하다.'…….


써놓고 보니 아빠가 한 말도 꽤 많다. 그런데 나는 왜 엄마에게만 불평을 토로하는 걸까? 이것도 프로이트의 무슨 심리랑 관련이 있나. 어렵다. 언젠가 상담사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엄마가 가장 만만해서 그래요.' 뭐야, 나 위로해주려고 돈 받은 사람 아닌가요? 왜 죄책감이 더 늘어나는 기분이죠?(이 말을 했던 상담사와의 상담은 일련의 신뢰감 떨어지는 다른 일로 그만두었다.)




미안하다는 엄마의 말을 듣고 전화를 끊은 뒤 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뿐이란 생각만 들었다. 의자를 곧추세우고 시동을 건 뒤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가장 간단하고 쉬운 ‘많이 먹기’와 비슷한 도피처이지만 결이 다르다. 음식을 집어넣을 땐 잊고 싶은 일을 밑으로 꾹꾹 눌러내는 기분이 난다. 그만큼 꾸역꾸역 담고 있어 몸도 맘도 더부룩하다. 쇼핑은 정반대다. 돈이 나가는 속도와 양만큼 털어낼 수 있다.


마트에서 우는 사람들에겐 무슨 일이 일어난 걸지 궁금한 적 있는가? 장난감 앞에서 시위하는 아이들 말고 누가 마트에서 우냐고? 그렇다. 마트에서 울 일이 뭐가 있을까. 반대로 생각하면 쉽다. 아무도 울지 않는 곳이 당연하기에 사람들은 타인의 눈동자 주변 같은 것엔 신경 쓰지 않는다. 천장까지 가지런히 진열된 물건 틈에서 필요한 걸 찾는 데 온 신경을 가져다 쓴다. 더 싸고 양이 많은 상품, 조금이라도 품질이 낫고 유통기한이 긴 제품을 찾는 것에 몰두하다 보면 삶은커녕 사람 얼굴 같은 것엔 관심 둘 새 없다. 하다못해 길에서 마주치는 '랜덤 피플'도 슬쩍 이나마 얼굴을 보고 지나가지만, 대형마트에선 물건을 보느라 그럴 틈이 없다. 동네 슈퍼는 예외다.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확률이 월등히 높다. 수백 수천 명의 불특정 다수 속에서 안전하게 울 수 있는 곳은 층별로 카트를 끌고 유랑할 수 있는 대형마트뿐이다. 주저할 것 없다. 태어나자마자 스스로 용케 해낸 건 사람들에 둘러싸여 우는 일이었다.


계산을 마치고 피부과로 갔다. 3주째 입술 습진이 낫질 않고 있었다. 의사는 빼쭉 내민 입술을 보더니 피곤하게 지내지 말라고 한다. 무뚝뚝하게 말하지만 그건 타고난 성향일 뿐이고, 실은 상냥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7일 치의 연고를 처방해주고, 일주일이면 마음 피곤한 일도 사라질 거라는 위로를 처방전에 담은 건 아닐까. 연고 이름을 검색해보니 꽤 독한 스테로이드 성분이 들어있다. 입술 주변으로 얇게 펴 발랐다. 7일 뒤에는 거울 속 내가 조금 더 나은 모습이 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서울과 제주 사이, 누구의 마음도 이해받지 못한 채 허우적댄다.

자식들 잘살길 바라는 마음만 뭍에 닿아 겨우 숨을 고른다.


밑줄을 긋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좋을 텐데

‘나라는 개인은 사회의 지표이기도 하다'는 어려운 말에 위로를 받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K장녀, 감정 쓰레기통, 화목해 보이지만 진심 어린 대화는 할 줄 모르는 베이비부머 세대의 4인 핵가족, 유교적 도리와 의무를 짊어진 채 2022년에 현존하는 사람들, 서로에게 서운해하며 사랑하는 존재들…….


죄가 되지 않을 만큼만 미워하자고 다짐한다.


(마음이 멍 투성이라 울고 싶다면, 마트 휴무일을 미리 체크해 두도록 하자. 엘리베이터가 있을 만큼 규모가 큰 다이소도 나쁘지 않은 대안이다.)




물풀의 네 번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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