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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풀 Jan 12. 2023

칭칭 감긴 탯줄 풀기

울다가 웃으며 쓰는 밀린 일기

아빠 안 닮으려고 기를 쓰느라 엄마를 닮고 있는 건 몰랐지 뭐야


시트콤 <프렌즈>에 나왔던 말이다(기억 속엔 저 대사인데, 엄마와 아빠가 뒤바뀐 걸지도 모르겠다). OTT 같은 건 없던 2000년대 초반이었다. 결혼 같은 건 하지 않고 살 거라고 당연히 생각했던 이십 대 초반이었다. 갓 저 장면을 보며 그렇게 깔깔깔 웃었다. 


너는 정말 결혼 제일 늦게 할 줄 알았어.
그렇게 빨리 시집가버릴 줄은 몰랐지. 


학창 시절 친구들을 만나면 꼭 듣는 말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때 시집은 부모님과 나를 동시에 만족시킬 만한 탈출구였다. 뭐든 알아서 잘하는(해내는) 큰딸이었지만, 엄마의 과도한 불안과 걱정은 날 단단하게 옥죄었다. 스무 살이 넘도록 탯줄을 칭칭 감은 채 사는 것 같았다. 벗어나고 싶었지만, '효도'는 내 삶에 디폴트 값이었다. 자식이 뭘 해도 믿고 지지해주고, 제사도 안 지내는 사람의 집(=시댁)은 이상적이었다. 고작 스물다섯이었다. 지금의 남편인 당시 남자 친구를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취집한 케이스는 아니다. 새벽부터 만나 통금(그렇다, 취업한 뒤에도 통금이 있었다. 밤 10시, 헐.)까지 꽉 채워 붙어 지낼 만큼 좋았다. 다만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차라리 이직을 하거나 엉뚱한 사업을 시작해보는 건 어땠을까 아쉽다. 부모님을 떠나거나 걱정이 될 만한 일을 하는 건 가당치 않았기 때문에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떠나야 살 수 있을 것 같아 결혼을 택했다. 취직과 취집을 동시에 성공한 나 칭찬해줘야 하나.

무지개와 나, 형제 해안로


아웃사이더로 사는 게 편한 내가 이 모임('완엄생' 글쓰기 모임)을 만들어 리더를 자처한 건 토하고 싶어 미쳐버릴 것 같아서였다. 유별나게 예민해 날 괴롭힌다고 여겼던 아이가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걸 보면서, 나도 다시 크고 있다는 느낌이 자주 들었다. 그럴 때면 당황스러워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고 종종걸음을 쳤지만, 내 안에 어떤 아이가 자꾸만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옷깃을 잡아당겼다. 더 나이 들기 전에 열어보고 싶었다. 마땅한 이유와 용기가 필요했다. 깊숙한 곳에 던져 놓았던 황금빛 보자기를 다시 집어 들었다. <엄마를 미워하면 나쁜 딸일까>, <모녀의 세계>, <나의 무례하고 다정한 엄마> 같은 제목의 책도 마구 사들였다. 




아이가 백만 스물한 번째 저지레를 하는 동안 싱크대 모퉁이에 주저앉아 엉엉 우는 게 빼놓을 수 없는 저녁 일과였을 때였다. 모든 건 날 이렇게 기른 부모님 때문이라 탓했다. 가장 만만하고 가까운 주양육자인 엄마에게 화살을 돌렸다. 아이에게 '욱'하는 지점에서 하필 나는 내가 싫어하고 무서워했던 부모님의 모습을 똑 닮아 있었다. 자식들을 사랑하는 만큼 불안이 깊어져 전전긍긍하는 엄마의 모습을 복사한 것처럼 따라 하고 있는 나를 보면 소름이 돋았다. 불안도와 예민함이 높은 아이의 기질을 잘 이해해 극복하고 성장하게 하려니 생각이 많아졌다.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의 나와 원가족을 돌아봐야 했다.


그렇게 유년 시절에 대한 집착이 시작됐다. 나와 아이 사이에 균열이 생길라치면 고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쩐지 억울한 느낌이 들어 탓할 대상이 필요했다. 매일같이 이렇게 곤란한 감정에 휘둘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여린 존재를 제대로 양육하지 못한다면, 그건 다 내 어린 시절 때문이라고. 제대로 사랑받지 못하고, 원하는 만큼 표현하지 못했던 환경과 분위기 때문이라고.


아이가 유난히 자주 울며 깨는 날이 이어지면 불길함이 엄습했다. 남들은 백일의 기적이라 ‘떠들어댄’ 통잠(밤에 잠들어 적어도 7시간 이상 쭉 자고 아침 녘 일어나는 것)은 기다리다 지쳐 포기할 때 즈음 찾아왔고, 그게 아마도 다섯 살이 되던 해 봄인가 여름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일 년 넘게 통잠 잘 자던, 곧 여섯 살 어린이가 될 걸 앞두고 있던 어느 날 아이는 밤마다 무슨 꿈을 꾸는지 서럽게 울었다. 달랜다고 달래 지면 좋으련만 안아주고 창문을 열고 눈뜨라고 꿈이라고 찬바람을 쐬어줘도 눈을 감고 울었다. 짐승처럼 울었다. 눈썹 사이가 일그러지고 넙죽한 코를 미간으로 올려붙일 듯 찡그리며 울었다. 산짐승이 매서운 놈에게 잡아먹힐 때처럼, 꺼이꺼이, 흐엉 흐엉, 끄윽 끄윽. 그 소리를 오 분 넘게 듣고 있으면 안쓰러운 마음보다는 짜증이 밀려왔다. 그러다가 다시 안쓰러운 마음으로 돌아와 더는 울음을 그치게 할 방법이 없을 것 같아 그냥 체념하고 품에 낀 채 우는 얼굴을 바라보노라면....... 

 

그러노라면 이 삶은 저주일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에 고여 나도 그만 왈칵 눈물이 고였다. 분명히 기억한다. 한가득 뱃속에 들어차 꿈틀대는 것을 부여잡고, 내가 저렇게 꺼이꺼이 울었다. 흐엉 흐엉, 괜히 아이를 가지려 했다고. 끄윽 끄윽, 제발 다 꺼지라고.

 

다시 아이가 우는 밤이면, 나와 눈과 코와 미간이 똑 닮은 아이가 눈을 감고 꺼이꺼이, 끄억끄억, 흐엉흐엉 짐승처럼 울다가 언제 그칠 줄 모르게 울면, 아이는 무의식 중에 나를 따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그게 바로 처음 세상을 만나기 전 배속에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었을 그 절규와 울음이 아니고 뭐겠냐고. 나와 똑 닮은 성격을 가져서, 그래서 자기 잘못이 아님에도 갈등이 생길 것 같으면 일단 아니라고, 괜찮다고 잡아떼는 아이를 보면서, 나는 이 삶이 저주일 수도 있겠다고. 부디, 저 아이만은 나처럼 살지 않길 바라는 게 그게 내 가장 큰 소망일진대, 그 소박한 소망조차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건 저주가 아니고 무엇이겠냐며.


무지개와 아이, 유수암 마을


한데 아무래도 좀 거짓을 쓴 것 같다. 


산후우울증(및 육아 우울증)은 정말 무섭다. 이제 아이가 좀 크고 내 일도 조금씩 하며 살 만 해져서 그런가? 도저히 살 만하지 못했던 초보 엄마 시절에 펼쳐 보았던 일기장은 온통 상처받은 내면 아이의 증거품 목록으로 가득했는데, 5년 만에 다시 보니 좀 밋밋했다. 오히려 한 달에 한 번 검사하는 일기가 밀릴까 봐 아무 말 대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잘못한 게 없는데도 반성할 거리를 매일 찾는 모습이 가엽고 안쓰러웠는데, 당시 문방구에서 산 일기장 공책엔 '오늘의 반성할 일' 칸이 아예 인쇄되어 있었다. 빈칸을 채워야 하니 뭐라도 쓴 건 아니었을까?


글로 써서 흘려보내고, 말로 토해내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주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목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웩웩거리기만 했지, 진짜 토하지 못해서 기분만 잡치기 일쑤였는데 말이다.


빛바랜 일기장 곳곳에 등장하는 친구들 이름을 보니 잊고 지낸 얼굴들이 갑자기 떠오른다. 대길이와 지연이, 소연이와 성욱이. 안경 쓴 모습이나 머리 스타일, 나를 쳐다보던 표정 같은 게 모두 생각났다. 좋아하는 마음이 생겨 몇 날 며칠을 앓게 했던 어떤 아이는 외려 떠오르지 않아 웃기기도 했다.


예민하고 불안도가 높은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는 어느덧 초등학생이 되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훨씬 잘 적응하고 있다. 아침에 등교할 때 친구를 보면 차에서 내려 뛰어간다. 친구와 트러블이 생기면 소리치며 제법 제 주장을 할 줄도 알고, 낯선 사람 투성인 곳에서도 날 찾지 않는다. 이유도 모른 채 시도 때도 없이 터지던 눈물도 어느샌가 사라졌다. 아기 티를 벗고 제법 어린이의 모양새도 보인다. 돌봄 생활이 전처럼 고되지 않고, 이제는 조금 느리게 컸으면 하고 바라는 때가 많아졌다. 이런 게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 되었다니 놀랍다. 


우리 모두 잘 자라고 있었구나.


티브이에서는 금쪽이 들이 나와 자신의 결핍을 토로한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게 당연한 결핍 앞에서 내 상처가 더 크다는 걸 확인하는 데에 남은 생을 쓰고 싶진 않았다. 닥치는 대로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다. 두 해가 넘도록 상담센터와 정신의학과를 다니며 보자기 속 일기장을 열어보고, 글을 써서 정리하는 것으로 내면 아이와의 긴긴 만남을 마무리해도 될까? 솔직히 말하면 이제 조금 지겹기도 하다.


이제 다 된 건가?




며칠 뒤면 오랜만에 친정집에 간다. 아이가 좋아하는 기차를 잔뜩 타고(제주엔 기차가 없어 우리에겐 중요한 일이다), 꽃게를 쪄서 살을 발라 흰 밥에 올려 먹을 것이다. 이제 엄마 아빠 앞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속 편히 풀어놓을 수 있겠냐 묻는다면 대답은 'No'다. 다만 더는 애쓰지 않으려 한다. 내가 나고 자란 집에 드는 빛과 어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로 했다. 나는 그곳에 더는 머무르지 않는다. 결혼한 지 12년, 엄마가 된 지 6년이 다 되어서야 온전한 내 둥지를 마련한 기분이다. 나를 닮았지만 결코 나처럼 살지 않을 아이가 이 안에서 안전하게 자라나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다. 내 눈가에 패이는 주름이 찡그림 보단 웃음을 닮아가길 소망한다. 크게 뽐낼 것 없고, 군데군데 구멍도 났지만 충분히 아늑한 둥지에서 이 글을 쓴다.


1993년 열 살의 일기장엔 포도를 먹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아주 정답게 먹었다고 한다. 아빠 한입, 엄마 한번, 나한 번 동생 한 번 아주 재미있게 먹어서 더욱 맛있었다고 한다. 시내 구경을 하고 놀았던 날엔 아빠를 '내 사랑'이라 쓰기도 했다. 우린 사랑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해본 적 없는 사이다.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어서 웅크려 앉아 있던 한 아이가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고만고만한 귀엽고 천진한 아이들 틈으로 뛰어들어간다. 용기를 내주어 고맙다. 스스로에게 어울리는 자리를 찾아간 아이를 뿌듯하게 바라본다. 그때의 나를 칭찬하고 지금의 나를 응원하며 보자기를 덮는다. 당분간은 열어보지 않을 생각이다.



물풀의 다섯 번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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