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일지 - 2 번외 편. 9/29, 목요일
첫 만남을 가진 후, 저마다의 첫 글을 들고 다시 만나는 자리.
‘완엄생’의 ‘J’들이 ‘으른의 식당’에서 온전히 ‘내’가 먹고 싶은 메뉴를 주문하고 있을 때, 나는 어느 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딸의 손을 잡고 색깔판을 뒤집고 있었다.
내 딸이 속한 ‘느영’ 팀의 파란색이 초록의 잔디 운동장 위에 더 많이 보여야 한다. 초록과 파랑만 보이게. 빨강은 안돼. 어지럽게 널린 빨강을 없애는데 몰두하다 보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호루라기 소리에 움직임은 일시 정지. 나는 왜 이렇게 숨을 헐떡이고 있는 것일까. 달리기를 한 것도 아닌데 숨이 차서 고개가 자꾸만 땅으로 처박힌다.
그때, 누가 내 어깨를 딱 잡는다.
화들짝 놀라 뒤돌아보니
엄청나게 열심히 하대요? 똘(‘딸’의 제주도 방언) 보다 더 열심히 뛰던데?
한 달 전 졸업한 해녀학교 동기생이다. 16주 과정을 함께 하는 동안 얼굴 인사만 하던 사이. 아이들이 같은 학교에 다니는지 몰랐다며 그제야 전화번호를 교환하게 된 사이. 이제는 같은 학교 학부모이자 물질 동기가 된다.
유치원생들이 공 넣기 시합을 시작한다.
먼발치에서 어린 함성이 들린다. 알록달록 볼풀이 하늘 위에 봉봉 뛰어오른다.
우리도 엄마가 꿰매 준 콩주머니 들고 와서 던지는 거 하지 않았어?
어 맞어 맞어. 근데 우리는 이렇게 다 나와서 못했잖냐. 반이 열두 개나 됐으니…
어느새 나는 옆자리에 앉은 나의 초등학교 동창과 그 시절 이야기를 하고 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났을까. 딸아이 학교에서 진행하는 마을 탐방 행사에서 참가자 명단을 호명하는데 갑자기 누가 무리에서 급박하게 튀어나왔다.
너 맞구나! OOO!
키 크고 달리기가 빨라 육상부의 노란 유니폼을 입고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우리는 당시 국민학교에 다니던 서울시 사당동도 아니고 제주시 한림읍 시골 학교 학부모로 다시 만났다.
그렇게 우리는 아무리 기억을 짜내 보아도 공통된 친구 하나 나오지 않았던 그 시절에 공유하는 기억을 하나 찾아낸다.
갑자기, 딸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나에게로 다급히 걸어온다.
3학년 학부모가 참여하는 순서인데 수다에 빠져 미처 방송을 듣지 못했나 보다. 평소 꾸물거리는 딸 손목을 이끌고 성큼성큼 목적지로 데려갔던 것처럼 딸은 내 손가락을 붙들고는 과한 보폭으로 겅중겅중 뛰어 나를 운동장 쪽으로 끌어낸다.
나는 겸연쩍게 목덜미를 긁적이며 학부모가 웅성웅성 모여 있는 운동장 대기선에 선다. 일부러 얼굴 아는 사람들과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 시선을 피하며…
이번에는 이어달리기하는 아이들에게 낱말카드에서 제시하는 물건을 구해다 줘야 하는 미션이다. 아이들이 열을 맞춰 달리기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엄빠들은 각자의 아이 열에 자신을 맞춰본다. 촬영 구도도 신경 써야 하고, 선생님들이 고의로 흘린 사전 유출된 낱말 중 어떤 것이 내 아이의 순서에 들어갈지 눈치도 봐야 한다.
혹시 누구 엄마세요?
옆에 섰으니 한 반 아이의 엄마임은 확실한데 처음 보는 얼굴이다. 우리가 한 달 전에 이사 온 동네 이웃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두 엄마의 이야기는 그렇게 제주도에 오게 된 연유에서부터 동네 길고양이 정보공유까지 번져간다. 어색함을 누르고 두서없이 이어지는 대화는 내 아이 순서가 오자 순간 일시정지가 된다.
그리고 카메라에는 멋지게 트랙을 돌고 있는 아이의 모습 대신 다급하게 낙엽을 찾아 헤매느라 흔들리는 땅과 발들과 하늘이 영상으로 남았다.
사실 나는 이 운동회에 정말로 오기가 싫었다. 첫 번째는 요즘 서먹한 사이가 된 내 딸 단짝의 엄마 얼굴을 보기가 걱정되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모르는 사이보다 못한 얼굴만 아는 사이인 사람들 앞에서 뒤뚱뒤뚱 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새로 시작한 모임 시간과 겹치게 되면서 세 번째 이유가 추가되었다. 초면이나 다름없는 멤버들에게 너무나 미안한 동시에 운동회에 빠져도 될 완벽한 구실이 생겼다는 것을 즉시 알아차렸다.
그러나 단 1초도 운동회에 안 가고 다른 일을 보겠다는 마음은 먹을 수 없었다. 같이 뛸 부모 없이 운동회를 치러야 할 아이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 마주하기 화끈하고 가시방석에 앉은 듯 뻘쭘할 걱정에 잠을 설쳤을지언정, 아침 등굣길 한두 방울 떨어지는 빗방울에 운동회가 취소되려나 내심 반가웠던 마음을 몰래 품었을지언정.
나, 엄마는 운동회에 꼭 간다.
엄마니까 두 눈 질끈 감고 정면돌파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내가 운동회에 가기 싫었던 진짜 이유는 나의 초등학교 운동회가 즐겁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문방구 처마에 영롱하게 걸린 꼭두각시 색동 한복 대신 손으로 오린 번쩍이는 종이 왕관에 왕별을 손에 달고 율동을 해야 했던 굴욕감, 아둔한 운동신경에 구석에서 운동 잘하는 친구들을 응원만 해야 했던 지루함, 존재감도 없으면서 많은 사람 앞에 서는 공포감, 발 디딜 틈 없는 흙먼지 속에서 급하게 김밥을 먹고 토했던 아픔, 뛰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뛰는 나를 큰 소리로 부르고 사진으로 남겼던 엄마에 대한 원망.
나의 운동회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끝나 있었다.
오늘의 운동회는 달랐다. 만날까 두려웠던 사람보다는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들을 만났다. 팔꿈치 꼬집으며 멀뚱멀뚱 네 시간을 서 있어야 할 줄 알았는데 초등학교 동창생을 옆에 두니 편안하다 못해 누워서 하늘을 감상하고 잠깐 눈도 붙이는 여유를 부려보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달리기는 게임에만 온전히 매달리느라 딸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재잘대는 함성 소리, 왠지 정겨운 전문 진행자의 제주어 농담, 그림책에 등장할 만한 푸르른 잔디와 하늘, 알록달록 귀여운 학년별 단체 티셔츠들, 엄마들의 거리두기 가능한 돗자리들, 그리고 교장 선생님께서 3년 만이라며 감개무량해하시던 만국기.
이렇게 엄마가 되고 나서야 나의 마지막 운동회 기억이 업데이트되었다.
똘아, 고맙다. 운동회는 즐거웠다.
<J, 완연한 엄마 생활> 두 번째 모임 일지 번외 편 끝. / 미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