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l] 용기

by mool


예전 대학생 때 다니던 모델학원에 용기 라는 남학생이 있었다.

나와 동갑이었는데, 키가 무척 크고 융통성이 없어보일만큼 성실했다. 당시에는 운동 선생님도 따로 있었는데, 운동 동작들이 다소 웃겨서 다들 조금씩 그 시간에 키득거리곤 했다. 그애는 달랐다. 누구보다 열심히 수업을 따랐고, 거의 수제자 느낌으로 모든 동작을 마스터하려 노력했다. 학원 아래층에는 헬스장이 있었고 수강생들에게는 무료로 개방되었다. 그애는 사각팬티처럼 짧은 바지를 입고 매일 헬스장을 갔다. 살짝 괴짜 기질이 엿보여서, 다들 약간은 무시하는 듯한 느낌도 있었는데 그애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일을 했다. 그리고 그 학원에서 남자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실제 모델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애는 자기 이름답게 행동했던 듯하다.

용기. 남들이 뭐라건 자신의 꿈을 향해 할 일을 해나가던 모습들. 다른사람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계획대로 나아가던 것. 물론 그애에게도 여러가지 어려움과 시련이 있었을거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용기 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그 아이가 자주 생각난다.


한창 잊고 지내다가 그 애의 소식을 알게 된 건, 뜻밖에도 전광판을 통해서였다. 당시 일중독 프리랜서이던 나는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공유오피스에 매일 출근도장을 찍었고, 가장 늦게 사무실을 나서곤 했다. 그게 멋있는 줄 알고 그렇게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여느날처럼 늦은 저녁 사무실을 나섰다. 네온사인과 술집이 즐비한 강남의 번잡한 뒷골목을 걷고 있는데, 한 속옷브랜드 매장 앞에 그 애의 전광판이 있었다.


'용기...?'


속옷 차림으로도 부끄러움이나 과시욕 없이 담백하고 청량한 느낌이었고, 다시봐도 영락없는 용기였다. 순간 마음에 몽글몽글 다양한 감정이 일었다. 가장 큰 부분은 뭐랄까, 기쁨 비슷한 거였다. 주변의 은근한 비웃음에도 자기 할 일을 해나가던 그 애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인과관계라는 말을 좋아한다. 진심으로 노력한 사람이 빛을 보는 것,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 사람은 결국 그 대가를 치르는 것, 그런 것들을 좋아한다. 너무도 인과관계가 명확한 일이었다. 용기는 노력을 했고, 결과를 만들었다.


나에게는 어떤 용기가 있었을까.

나는 오랜 시간 나를 용기있는 사람으로 생각했지만, 돌아보면 용기가 반쯤 있다가 사그라든 순간이 더 많았다. 특히 나 스스로를 존중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는 걸 깨닫는다.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생각하는 것을 명확하게 표현할 용기 말이다.


어제만 해도 비슷한 패턴을 경험했다.

최근 활동하고 있는 모임에서 나는 운영진 중 한 명이었다. 가장 막내였지만 나를 무시하거나 어리다고 얕보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어른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쉽게 주눅이 들었다. 스스로를 축소시키고는 했다. 어제도 팀에 중요한 의견을 냈다가, 혹시라도 누군가를 불편하게 할까 봐 삭제하기를 반복했다. 실제로 끝끝내 계속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내가 아무리 의견을 다시 내도 또다시 반대 의견을 냈다. 다시 목소리를 냈다가는 둘의 신경전처럼 번질 것만 같았다. 나는 목소리를 줄였다.


그럼에도 해결을 해야했다. 운영진의 애매한 공지로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 낙오하게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한 사람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이 모습을 지켜보는 구성원들은 '팍팍하다', '운영진이 애매하게 기준을 주어놓고 사람 노력을 무시하는구나' 생각할 수 있었다. 다들 성인이라 말은 안 하지만, 은근한 반감이나 사기저하로 이어질 것 같았다.


결과적으로 나는 오전부터 오후까지 그 문제를 해결하려 애를 썼고, 운영진 멤버 몇몇에게 개별적으로 전화를 걸어 설득했다. 그들은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결국 의견을 받아주었고 내가 아닌 그들의 결정인 것처럼 공지가 나갔다. 사람들은 환호했고 모임의 분위기가 좋아졌다. 하지만 나의 노력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노력을 했고, 누군가를 설득했고, 실제로 변화를 만들었고, 모임이 좋아졌다. 그런데 왜 나는 왜 없는 사람, 또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사람'으로만 남은 것일까. 나의 노고는 조용히 뒤에서 이루어졌고,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나는 왜 늘 조용히 애를 썼을까.


미운털이 박히기 싫었구나. 나대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구나. 그래서 의견이 확실히 있으면서도, 적었다가 삭제하기를 반복하거나 전체 사람들이 나의 노력을 알아채지 못하게 했구나.


용기의 문제였다.

용기, 용기.


미움받을 용기와,

나와 내 의견을 존중할 용기,

그리고 그 마음에 따라 앞으로 나아갈 용기.


어쩌면 인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면에서 그랬다. 내 직업을 선택할 때, 나의 기분을 말할 때, 나는 상대의 감정까지 떠안아 쩔쩔매는 게 아니라 상대가 불편해하더라도 나의 의견과 감정을 표현할 줄 알아야 했다.


누가 날 어떻게 보든, 나 스스로를 존중하는 용기.

나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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