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두 번째 리드②
자본은 국가에 두 얼굴의 야누스가 되라고 요구한다. 연말연초면 기업을 가로막는 규제를 풀어달라고 거듭 호소하면서, 경쟁국에 밀리지 않으려면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고 외친다. 자본이 주장하는 근거는 사업보국이다. 하지만 작은 정부이면서 큰 정부가 되기는 쉽지 않다.
규제는 해악이라던 기업들이 이제는 국가에 금전을 요구한다. 국회에 발의된 반도체특별법이 보조금 지급 근거를 명시하자 배터리와 디스플레이 산업에서도 이러한 요구가 빗발친다. 반도체는 인공지능(AI) 시대 핵심 산업이라며 이미 법안이 나와 있다. 디스플레이는 수출 효자 품목이라서, 배터리는 약속된 미래 산업이기 때문에 보조금을 요청한다. 반도체가 물꼬를 텄다. 시작이 어렵지 그 다음은 쉽다.
정부가 AI 시장의 수요자이자 투자자가 돼 달라는 최태원 회장의 요청도 같은 맥락이다. 정부가 나서서 우리나라의 AI 산업을 키워달라는 취지다. 이재명 대통령이 AI를 강조하며 친기업 행보를 띠자 자본도 자신감을 얻은 모습이다.
기업 입장에서 보면 크고 작은 정부가 동시에 돼 달라는 모순은 일부 이해가 된다. 앞날이 밝은 국가 핵심산업을 키우려면 대규모 초기 투자가 불가피하고 정부 예산이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다. 동시에 기업활동을 가로막는 규제는 사업 육성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다.
그러나 한 발 떨어져 바라보면 이는 자본이 사익을 추구하기 위한 명분 중 하나다. 모든 산업은 어떤 형태로든 정부 지원을 요구한다. 그러나 정부 예산은 한정적이다. 선택과 집중을 할 수밖에 없지만 어떤 산업에 예산을 투입할지를 두고 적정성·타당성 논란이 발생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갈등을 낳을 수 있는 불씨다.
보조금을 주면 기업들이 국내 투자에 적극 나선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투자를 결정하는 요인은 제조비용, 고객 수주 및 수요 확보 안정성, 기술 유출 가능성 등 다양하기 때문이다. 국내 제조비용은 개발도상국과 비교해 비싼 편이고 수요 확보 안정성도 높지 않다. 반도체 시장의 ‘큰 손’은 미국과 중국이며 배터리 산업의 고객사인 완성차업체들도 미국 정책에 맞춰 현지에 생산공장을 짓고 있다. 보조금을 지급해 생산비용을 지원하더라도 다른 요소를 고려하면 국내 투자 타당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의미다.
반대로 보조금 없이도 국내 투자가 이뤄질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기술 유출 우려 때문이다. 외국 경쟁사와의 기술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반도체의 경우 선단 기술 우위를 지키기 위해 첨단 제품을 우리나라 공장에서 만들고 있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중국 공장에서 구공정(레거시) 제품 위주로 생산하는 것도 이런 배경이다.
특정 산업 보조금 지급이란 관치 경제정책 대신 완전한 시장에 가깝게 규제를 해소하는 편이 국가 예산을 아끼면서 산업을 활성화하는 방안이 될 수 있다. 박정희씨가 대통령직을 수행하던 시절과 달리 지금의 우리나라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고도화된 상태다. 과거에는 국가주도 경제정책이 유효했을지라도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현재 필요한 건 규제 패러다임의 변화다. 법이 허용하는 사항 외에는 불법으로 규정하는 기존 포지티브 규제를, 법에서 금지하지 않으면 모두 허용하는 네거티브 규제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AI와 로봇 같은 신산업이 떠오르고 다양한 서비스 개발이 이뤄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시도를 실행해야 수요자 반응을 살필 수 있고 더 나은 서비스·제품을 만들 수 있다. 과도한 규제 완화로 산업안전·노동·환경 분야에서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에 합당한 처벌을 부과하는 게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보조금을 주는 식으로 정부 개입이 불가피하다면 무상지원으로 끝나지 않게 조건을 붙여야 한다. 예컨대 정부 투자개념으로 배당 방식을 취해 수익을 환원하는 식이다. 국민 세금을 쓰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사기업 지원을 넘어 공익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여전히 유효하다. 애덤 스미스가 처음 설명했던 바와는 의미가 다소 변했지만, 시장 참여자의 욕구는 경제 활동의 주요 동력이다. 정부는 이러한 욕구를 활성화하고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마련하면 된다. 자본은 그 특성상 이중 정부를 거듭 요구하겠지만 정부의 경제 원칙은 분명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