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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쓰 Sep 30. 2023

기화펜 러브레터 -4-

러브레터는 3시간 후에 사라질 거야

지금은 고요해진 자습실을 바라본다. 내 자리에서 일어선 후 옆자리에 앉는다. 다음 가방에서 자주 쓰던 노트를 꺼낸다. 그날 민서가 낙서했던 수행평가 노트이다. 맨 뒷장을 예쁘게 찢어 책상에 올려둔다. 그리고 종이 가운데 한 문장을 써본다. 


졸업식이 끝나면, 후문의 벚나무 아래에서 만나자.   


짧은 한 문장을 마음을 담아 꾹꾹 눌러 적는다. 보낸 이도 적혀있지 않고 시간대도 애매한 두루뭉술한 문장. 그것은 고백 전 내 부끄러움을 투영한 본심이 반영된 탓이다. 종이를 세심하게 접어 쪽지 모양으로 만든다. 아주 간단한 형식의 러브레터 완성이다. 그 쪽지를 [이민서]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는 옆자리에 올려둔다. 


그녀가 자습실에 오지 않으면 이 러브레터는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3시간이 지나면 내용마저 사라질 테지. 하지만 나는 그녀가 이 쪽지를 볼 것이라고 확신한다. 객관적인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그녀가 나와의 추억을 소중히 여겼다면, 분명히 자습실에 들릴 것이라는 추론 하나만이 내 편을 들어준다. 전혀 논리적이지 않지만, 그녀의 행동에 도박을 걸어보고 싶다. 아침에 해야 할 일은 무사히 끝났다. 이제 교실로 돌아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복도에 나왔지만 기화펜은 여전히 내 손안에 있다. 평소라면 멈춰 서서 필통 안에 넣었을 텐데, 괜한 변덕이 내 행동을 바꾼다. 나는 그 펜을 호주머니에 넣어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펜과 나란히 걷는 기분이 되어 묘한 만족감이 든다. 교실로 걸어가면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왜 나는 샤프가 아니라 기화펜으로 문장을 남긴 것인가. 이 펜은 내 고등학교 생활의 절반을 함께 동고동락한 동지이다. 하지만 그것이 러브레터를 기화펜으로 쓴 이유가 되진 않는다. 여러 가지 미사여구가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들은 단순한 자기변명이었음을 깨닫는다. 나는 그저 그녀에게 받은 필기구로 러브레터를 쓰고 싶은 것이다. 


여느 때처럼 아침 공부를 하던 새벽이었다. 전날 수행평가 때문에 밤을 새워 제정신이 아니었다. 누적된 피로가 오늘따라 신경이 쓰였다. 덕분에 집중이 평소처럼 되질 않았다. 


“19번에 3번인데, sin 함수를 전개하면…. 앗, 잘못 썼다. “

나는 지우개를 들고 샤프로 쓰던 공식을 지웠다. 

”뭐야, 아직도 샤프 쓰니? 엄청 불편하잖아. “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10년 동안 같은 샤프만 써봤어. 다른 샤프는 사본 적도 없어. “

”그럼 이 펜을 써봐. 기화펜이란 말 들어본 적 있어? “

”처음 듣는 단어야. 기화? 기체로 변하는 현상? “

”정확해, 이 펜으로 글씨를 쓰면 잉크가 3시간 후에 감쪽같이 사라져. “

그녀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노트에 ‘벚나무’라는 단어를 대문짝만 하게 적었다. 

”앗, 그거 수행평가 노트야! 낙서하면 안 돼! “

나는 깜짝 놀라서 민서의 행동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아까까지 눈꺼풀을 무겁게 한 잠기운은 신선한 충격에 깡그리 날아갔다.  

그녀는 그저 재밌다는 듯이 깔깔 웃었다. 

”괜찮아, 점심시간 때 확인해 보면 감쪽같이 사라질 거야. “

그리고 조회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앗, 나 볼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펜은 너 가져!”


그리고 그녀는 먼저 교실로 도망치듯 뛰어갔다. 나는 그저 뒤에서 찰랑거리는 흑발을 바라보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얼떨결에 받은 그녀의 펜을 손에 쥐었다. 펜에는 그녀의 따스한 열기가 남아있었다. 그 미약한 열기가 나머지 잠기운을 모두 앗아갔다. 제정신을 차린 나는 그 펜을 주머니에 꽂고 허겁지겁 교실로 돌아갔다. 선생님이 평소보다 약간 늦게 조회를 시작했던 것이 소소한 행운이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아까 민서와 풀다 만 수학 문제를 살펴보았다. 옆에서 상현이가 다가왔다. 상현이는 어릴 적부터 만나 고등학교까지 같이 다닌 절친이다. 지금처럼 학교 점심시간에 같이 줄을 서서 밥을 먹곤 했다. 상현이가 호기심 많은 눈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뭐야. 기화펜 쓰고 있잖아. 계속 같은 샤프 쓰지 않았어?”

“요즘 새로운 펜에 관심이 생겨서 바꿔봤어. 기분전환의 일종이지.”

“10년 동안 쓴 샤프를 버려? 시우 이거 정말 쉬운 남자네. 그러고 보니 우리 반 민서도 그 펜 쓰더라.”

흠칫, 내 목에 식은땀이 한 줄기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추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우연이겠지 우연. 그것보다 오늘 점심 메뉴 뭔지 알아?”

“엄청 맛있다는 코다리 강정. 난 점심 거르려고.” 

“혹시 라면 있냐? 내가 미리 냉동 만두를 매점에서 사뒀거든.”

그 말에 상현이는 뒤에 감춰두었던 컵라면 2개를 흔들며 웃음을 지었다. 

“그럴 줄 알고 이미 라면 들고 왔지, 바로 세팅하자.”


떨어진 두 책상을 붙여 재빨리 식사를 준비했다. 화제가 펜에서 자연스럽게 돌려진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책상을 치울 때 문득 아침에 있던 일이 떠올랐다. 지금은 점심시간이니 기화펜을 사용한 지 3시간이 지난 것이다. 그녀의 낙서가 진짜 사라졌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수행평가 노트를 덮기 전에 첫 장을 펼쳐보았다. 벚나무라는 대문짝만 한 낙서는 감쪽같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 상황은 컵라면의 맛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게 하기에 충분한 충격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3학년 교실 복도에 서있다. 3학년 복도 저 끝에는 민서가 있는 반도 보인다. 2학년까지 민서와는 같은 반이었다. 3학년부턴 다른 반이 되어버렸다. 반이 서로 멀어 하루에 한 번 만나기도 어려워졌다. 심지어 자습실도 3학년 1학기부터 공사를 시작해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민서와 만날 기회는 줄어들었다. 새벽에 매일 하던 아침 공부도 각자 교실에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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