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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쓰 Sep 29. 2023

기화펜 러브레터 -3-

달달했던 자습실의 추억 한조각

벌써 시간은 7시를 넘어가는 중이다. 이러면 시간에 맞출 수 없다. 서둘러서 교무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나는 3년 동안 출석부 담당을 맡아 매일 교실의 문을 여는 역할을 맡았다. 교무실의 책장에선 보지도 않고 손으로 여러 개의 출석부를 더듬는다. 손의 감각만으로 우리 반의 출석부를 뽑는다. 이 출석부를 뽑는 일도 오늘이 마지막이구나. 매일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졸업할 때가 되면 감상에 잠기기 마련이다.


“앞으로 1학년 5반은 정시우 군이 출석부 담당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발언이 끝나고 친구들의 박수가 교실을 채웠다.

가벼운 잡담 소리도 들렸다.

"시우가 언제나 가장 먼저 등교하긴 하지."

"선생님보다 먼저 등교한다니깐? 완전 출석부 담당 제격이지."

    

나는 멀리서 들리는 잡담 소리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 출석부에 걸려있는 키를 바라보았다. 출석부 담당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교실의 열쇠를 관리하는 것이다. 나는 등교 첫날부터 새벽 7시에 이미 등교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런 부지런한 모습이 선생님에게 인상 깊게 남았나 보다. 모두의 축하를 받으며 교실의 문지기를 맡았다.


그날 이후로 3년 간 반복했던 동작이다. 출석부와 함께 걸어가면서 생각해 본다. 분명 처음엔 일찍 등교해서 출석부 담당이 된 것인가. 하지만 나중에는 출석부 담당이 되어서 일찍 등교하게 된 것 같다. 인과관계가 어느샌가 역전이 된 것이다. 이렇게 빨리 등교한 것에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3년이 지나고 보니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새벽 등교 덕에 한 가지 소중한 것을 얻었다. 바로 민서와의 추억이다.


기계처럼 아무도 없는 텅 빈 교실을 열고 교탁에 출석부를 두었다. 볼 일 없는 교실은 뒤로하고 자습실로 향한다. 민서와의 추억은 교실보다 새벽의 자습실이 주 무대였기 때문이다. 나는 러브레터는 상대방과의 추억이 담긴 장소에 남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마음이 입체적으로 전해질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이유이다. 내 걸음은 점점 빨라져 자습실 앞에서 멈췄다.


자습실은 다른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졸업식 당일까지 공부하겠다고 올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내 지정석은 바깥 풍경이 보이는 창가 자리이다. 목적지에 제시간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의자에 걸터앉는다.

창밖을 바라보니 햇살이 내 몸을 파고든다. 민서와의 추억은 햇살보단 비바람이 함께했었다.


나는 출석부 담당이 된 이후 언제나 자습실에서 아침 시간을 보냈다. 아무도 없는 아침 자습실은 집중하기 딱 좋은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날은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비가 쏟아진 날이었다. 빗소리를 음악 삼아 책을 읽고 있었다. 하지만 내 집중은 길게 가지 않았다. 누군가 내 옆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아무도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누구인지 엄청 신경이 쓰였다. 옆사람을 곁눈질로 살펴봤다. 어깨까지 닿을 흑요석 같은 단발을 가진 여학생이었다. 그 머리카락은 틀림없는 민서였다. 민서의 머리카락은 비를 맞은 듯, 물방울이 이슬처럼 송송이 맺혀있었다. 나는 호주머니에 손수건이 있다는 것이 기억났다.     


”민서야, 머리가 젖어있으면 감기 걸려. “

손수건을 건네며 말을 걸었다. 나를 돌아보는 민서와 눈이 맞았다.

”앗.... 손수건 고마워. “

그녀는 머리카락과 얼굴을 닦았다.

그리고 손수건을 돌려주면서 내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오늘도 시우는 부지런하구나. “

”출석부 담당이니깐, 그러는 너도 일찍 등교했네? “

”아침에 공부하는 게 집중이 잘 돼. 너도 그렇지? “

”맞아, 고요해서 좋더라. “

”마침 잘 왔어. 혹시 이 문제 풀 수 있어? “

그녀는 수학 문제로 머리를 싸매고 있던 것 같다. 다행히도 수학은 내 특기 과목이었다.

”잠시만 기다려봐... 이건 이렇게 풀면서…. “

내심 수학 공부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로 누가 약속한 것도 아니지만, 매일 아침 자습실에서 같이 공부하는 사이가 되었다. 내 약점인 영어를 민서가 잘하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내가 모르는 문제를 물어보면 그녀가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그 덕분에 민서와 나는 시험마다 1, 2등을 나란히 가져갔다. 민서와 나는 채점결과 발표날 성적표의 기쁨을 하이파이브로 나눴다. 하지만 나에겐 그것보다 기쁜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민서와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아침마다 민서와 삼각김밥을 나눠 먹거나, 소소한 농담 따먹기를 하던 일상이 나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었다. 숫자만 적혀있는 성적표보단 그저 새벽 자습실에 그녀와 단둘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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