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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쓰 Sep 30. 2023

기화펜 러브레터 -5-

이성과 충동이 얽힌 사랑의 갈등

새벽 공부의 끝을 계기로, 나는 3학년 초부터는 성격이 좀 차분해졌다. 친구들과 말수도 줄어들고, 온갖 상황에 감흥이 없었다. 그녀를 만나지 못한 여파가 생각보다 크게 다가온 것 같았다. 그동안 있던 일들을 모든 것을 잊고 공부에 집중하려고 몇 번을 노력했다. 하지만 민서를 향한 감정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가끔은 스마트폰을 들어 민서의 전화번호를 눌러봤다. 연락이라도 해서 그녀와 대화를 해보려는 잡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하지만 도로 책상에 엎어두었다. 연락해서 어쩌려고?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길 것으로 생각했다. 3학년 담임선생님이 조회시간에 거듭 강조했던 말이 떠올랐다. 


"수험생활 중에 연애하지 마라. 데이트하다가 수험 한쪽이라도 잘못되어 봐라. 네가 상대방 인생 책임져줄 거냐? 너희 선배들 여럿 가르쳐 보니깐 그냥 고백 안 하는 게 답이야. 대학 가서 사귀어도 늦지 않다. 그땐 이성이 널려있잖냐. 공부나 열심히 해라."


교과서에도 적힐 법한 당연한 말이었다. 하지만 내겐 그 무엇보다 내 감정을 동요하게 만드는 조언이었다. 나는 이성과 충동이 계속 다투는 상황을 혼자 해결할 자신이 없었다. 이 고민을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상담하고 싶었다. 내가 상담했던 사람은 바로 상현이었다.

      

마음속에 고민거리가 생긴 다음 날, 구립 도서관에서 상현이와 공부를 마치고 저녁을 먹으려 구내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상현이는 공지 게시판에 있는 오늘의 할인 메뉴를 살펴봤다.


“오늘의 메뉴는 제육 덮밥! 인생은 아직 살 만한가 봐.”

“제육 덮밥이 3천 원이면 식당에 이익이 남긴 할까.”

“서비스라고 생각하고 먹자. 수험생활 때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니깐.”


서로 의미 없는 말을 주고받으며 키득키득 웃었다.  상현이와 함께 제육 덮밥을 받아 자리를 잡았다. 상현이의 기분도 좋아진 지금이 기회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제육 덮밥을 한창 먹다가 물을 마시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상현이에게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상현아, 나 중요한 상담이 있는데, 쉬는 겸 하나만 해줄래?”

“뭐야, 진학 고민? 밥 먹는 중에 완전 스트레스 생기는 주제야.”

상현이는 심드렁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연애 고민.”

“바로 이야기해 봐. 나는 언제나 준비된 상담가야.”

갑자기 의자를 고쳐 앉는 상현이었다.

역시 연애 문제는 모두의 관심을 끄는 보증수표라 다시 한번 확신했다.

“별일이래, 시우가 연애 생각이라니, 그것도 3학년 수험생활 중에? 그건 수험생활이 외로워서 괜히 감정 쓰레기통이 필요한 것 아니야? 그건 연애 감정이 아니라 그냥 외로운 거야. 착각하지 마.”

”아니야, 2년 동안 짝사랑 중인 첫사랑이야. 100% 연애 감정이라 확신한다. “

”과연, 그럼 확실히 연애 감정이지. 내가 상대를 맞춰볼까? “

”맞춰보던가. “


아무리 상현이라도 내 짝사랑을 단번에 맞출 리는 없었다. 평소에 새벽 등교도 하지 않는 편이고, 쾌활하고 놀기 좋아하는 친구가 내 마음을 그렇게 빨리 파악할까. 나는 절대로 상대가 모를 것이란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내 예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물거품이 되었다. 


”민서잖아. 걔 말고 더 있나? “

나는 물을 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꽤 예리한걸. 

”그렇게 티 났냐. “

”그것도 모르면 네 친구 못할걸? “

”알겠어, 민서 맞아. 공부하는 동안 계속 생각이 나. “

”연애 경력 4년인 내가 충고하는데, 지금 고백하면 넌 200% 이번 해를 넘기지 못할 거야. “

”고맙다. 넌 내 마음에 한 줄기 흉터를 남겨주었어. “     


제육덮밥을 다 먹고 음료수를 사러 갔다. 상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상현이 음료수까지 한꺼번에 샀다. 음료수 캔을 따며 다시 상담에 들어갔다. 이미 민서라는 것이 밝혀진 마당에 숨길 내용은 아무것도 없었다. 바로 본론에 들어가 물어보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

"수험생활 중에 고백하는 것은 성공해도 실패해도 문제야. “

그는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고백에 성공했다고 치자. 다음은 서로 수험생활을 쪼개서 만날 계획이야? 그럼 수능을 잘 칠 수 있을까? “

”그러면 고백을 먼저 하고 수능 이후에 만난다면 어떨까? “

”연애는 상대방을 생각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거야. 수험생활 동안 제대로 연애에 집중할 수 있겠어? “

”구구절절 맞는 소리만 하네. “

”맞지, 나도 최근 민정이랑 헤어졌거든. “


너무나 놀라서 음료수 캔을 놓쳤다. 거의 다 먹은 빈 캔이라 천만다행이었다. 캔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그 과정에서 상현이의 얼굴을 바라보니 잠시 씁쓸한 표정이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캔을 줍고 난 이후에는 이미 평소의 상현이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다, 이렇게 말했다. 


”4년 장기 커플도 수험생활에 무너지는 거네. “

”그렇더라고, 나도 알고 싶지 않았어. “

상현이는 깊은 한숨을 쉬고 다시 말했다. 

”그런 이유로 나는 반대, 고백할 생각이면 수험생활이 끝나고 하던가. “     


그러고 음료수 캔을 쓰레기통에 버리며 상담은 끝났다. 민서를 향한 마음을 수험이 끝날 때까지 전달하지 않기로 했다. 상현이 덕분에 방침은 정해졌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었다. 바로 민서를 향한 내 마음을 어떻게든 잠재울 방법이 필요했다. 시간을 내서 독서를 해봐도, 운동을 해봐도, 밤에 위로를 시도해도, 병원에서 연애 상담을 받아도 결국 그 해답은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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