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무쓰 Oct 01. 2023

기화펜 러브레터 -6-

왜곡된 애정과 기화펜 러브레터


그런 기억을 회상하며 복도를 걷다 어느새 교실에 다다른다. 교실에는 몇몇 친구들이 떠들고 있다. 떠들썩한 분위기 사이로 상현이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마지막 날에도 기운이 넘치는 친구가 먼저 말을 걸었다.


"졸업식 당일에도 자습실에 갔다 온 거야? 내일부터 학생도 아닌데 부지런하네!"

"핀잔 섞은 칭찬 고마워. 민서한테 줄 러브레터를 쓰고 왔거든."

기운 넘치던 상현이의 눈빛이 살짝 흔들린다. 

“뭐? 이미 고백했다고?”

“아니, 사람 말 제대로 들어. 러브레터를 전하고 왔어.”

직접 전한 것이 아니지만, 민서가 자습실에 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고 말한다. 

상현이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꼭 무슨 우려가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고전적인 방식을 선택했구나. 하지만 그 소식 못 들은 것 같은 눈치네."

"무슨 소식인데. 특별한 소식 있어?"

“졸업식 1시간 밀려서 10시가 아니라 11시에 끝난다고 한다. 러브레터에 시간도 쓴 거 아냐?”

"...................."


내 머릿속은 고장 난 컴퓨터처럼 쿨러가 돌아가는 소리로 가득 채워진다. 러브레터의 내용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시간은 두루뭉술하게 썼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진 않는다. 장소도 명확한 랜드마크라 상관이 없다. 문제는 잉크의 기화다. 졸업식이 10시에 끝날 거라 생각하고 기화 잉크를 사용한 것이 실수다. 11시에는 쪽지를 작성한 시간부터 3시간이 훌쩍 넘는다. 졸업식이 끝나고 나면 이미 쪽지의 내용은 기화가 된다. 그러면 민서가 졸업식이 끝나고 자습실을 들러도 의미가 없어지겠지.


서둘러 자습실로 뛰어가려 교실 문으로 향한다. 그 동시에 조회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그 즉시 선생님이 들어와 조회를 시작한다. 선생님은 태연히 졸업식의 시간 변경이라는 운명의 장난과도 같은 불행을 알린다. 

조회시간 내내 자습실로 가려고 시도해 보지만 헛수고다. 8시 반부터 바로 졸업식이 시작하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친구들과 강당으로 향한다. 혼잡한 학생들 사이로 민서와 눈이 마주친다. 민서도 이쪽을 본 듯 눈웃음으로 답한다. 그 시간은 불과 2초도 되지 않았지만, 내게는 한 편의 영화처럼 길게 느껴진다. 그녀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며 새삼스레 민서가 내 첫사랑인 것을 확인한다. 강당으로 향하다 문득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펜은 여전히 안에 있다.


기화펜은 내 애정을 쏟는 도구였다. 민서에 대한 마음을 투영한 내 마음 그 자체였다. 나는 상현이와 도서관에서 상담한 이후로 짝사랑의 해답을 찾았지만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속은 타오를 것 같았지만 그 상태로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수능이 3개월 남았던 날, 밤이 되어 집에 돌아가던 중이었다. 학교를 나가려던 차에 반가운 사람이 후문에 서 있었다. 흑요석 같은 단발은 틀림없이 민서였다.


”오랜만이다. 민서야, 무슨 일이야?"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말을 건 상태였다.

갑자기 말을 걸어 무엇을 말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가능한 것은 안부를 묻는 정도였다. 

“오랜만이네. 연락 없어서 전학이라도 간 줄 알았잖아.”

그녀가 웃으면서 대답을 이어갔다. 

"요즘 어떻게 지내?"

“뭐 똑같지, 오늘도 학교 와서 자습하다 돌아가던 길이었어.”

“맞아, 수능 100일도 안 남았잖아. 나도 비슷한 느낌으로 살고 있지.”

서로 타이밍도 맞추지 않았지만, 똑같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먼저 물어보았다. 

“너도 지하철역 가는 길이니?”

”맞아, 대화역 방향으로 타려고. “

”나는 오금역 방향이라 개찰구까지만 같이 가겠다. “

같은 지하철이면 참 좋았을 것이다. 아쉽단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대화역이면 길게 대화하지 못하겠구나. “

”설마 그거 농담이야? “

”공부로 과열된 머리를 차갑게 해주는 농담인데, 어때? “

”이런, 마음마저 아파지는 말장난이야. 20점 줄게. “

그녀는 항의하듯이 툭툭 내 어깨를 건드렸다. 

”뭐야, 점수 기계 잘못된 거 아니야? 수준 높은 농담이라 생각했었어. “


떠들고 나니 벌써 지하철역 입구에 도착했다. 묘한 침묵과 함께 우리는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와 더 대화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땅한 주제가 생각나지 않았다. 반면 내 머릿속은 매우 시끄러웠다. 혼자 간직하고 있는 이 짝사랑을 고백하고 싶었다. 매일 나를 괴롭히는 이 감정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녀와 이어지고 싶었다. 그 직후, 선생님의 한마디와 상현이의 조언도 내 머리를 스쳤다. 이 충동에 넘어가면 그 뒷수습을 할 자신이 없었다. 현실은 수험생활이라는 벽이 확고하게 고백을 가로막고 있었다. 혼자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개찰구에 도착했다. 그저 우리는 얌전히 입구에 들어가 개찰구로 향했다. 


”가봐야겠다, 조심해서 들어가. “

“다음에 봐, 잘 가.”


그녀는 반대 개찰구에서 손을 흔들었다. 나도 똑같이 손을 흔들며 그녀를 배웅했다. 수험생활 중엔 지금 관계가 최선이라 생각했다. 지금 고백해서 인간관계에 불화가 생기게 된다면, 최악의 결과로 이어질 터. 그저 나와 그녀의 행복한 수험 결과를 빌뿐이었다.


그날 밤 나는 고백을 하지 않았던 자신에게 무척 실망했다. 민서를 만난 탓인지 충동은 더욱 커진 상태였다. 민서를 향한 마음을 글로 적었다. 한마디로 노트에 러브레터를 작성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 손에 쥐어진 것이 그녀의 기화펜인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머리에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그녀에 대한 마음이 생길 때마다 기화펜으로 작성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면 무엇을 써도 3시간 이후에는 내용이 사라지는 마법이 이루어진다.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지만, 잉크는 기화될 수 있다. 절대로 이 편지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내일의 나에게도.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껏 사랑을 표현할 수 있었다. 그 글의 내용은 내 기억 속에만 남았다. 짝사랑으로 인한 집중 저하도 사라졌다. 나는 이 기화펜 러브레터를 매일 밤마다 작성했다. 그저 그녀를 향한 마음을 담아 작성했다. 


그 이후로 한동안 그녀와 만나지 못했다. 수험생활이 끝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발이 넓은 상현이를 통해 그녀의 입시 결과도 좋은 결과를 냈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 서로의 수험은 모두 잘 끝났다. 하지만 연락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나는 그저 그녀에게 말도 걸지 못하는 겁쟁이였다. 매일 밤 자기혐오를 더해 노트에 글로 고백할 뿐이었다. 마치 고해성사와 비슷한 작업이었다. 기화펜 러브레터는 내 짝사랑 충동을 해결할 훌륭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그녀에게 직접 전달하지 못한다는 불만이 남아있었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가고 졸업식은 다가왔다. 

이전 05화 기화펜 러브레터 -5-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