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서는 등교한 내내 지루함을 느꼈다. 졸업식 따위 어제와 다르지 않은 일상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3학년이 되면서 시우와 만날 수 없던 것이 영향을 준 것 같다. 일상의 모든 일들이 무미건조했다. 학교생활에서 퍼즐 한 조각이 빠진 기분이었다. 그런 그녀에게는 11시까지 진행된 졸업식도 큰 감흥이 없었다. 민서는 학교의 정문을 지나 단짝 민정이와 시내로 나가려던 참이었다. 문득, 민서는 자습실에 가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졸업식은 아무 의미 없었지만, 학교를 다시 올 일이 없다는 것이 마음 한 구석의 아쉬움으로 남아있었다. 학교와 이별하기 전 마지막으로 마음 정리를 하고 싶었다.
“민정아 미안, 나 자습실에 물건을 두고 온 것 같아.”
“졸업식인데 학교에 뭘 두고 오다니, 바보구나.”
“하하, 바보라 미안한데 자습실에 다녀올게.”
“알겠어.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아무런 거짓말로 민정이의 허락을 구하고 학교로 향했다. 여러 교실이 있었지만 민서의 발걸음은 굳이 자습실로 향했다. 고등학생 3년 동안 그녀에겐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새벽녘에 시우와 함께했던 추억은 가장 기억에 남았던 소중한 나날이었다. 마음의 아쉬움을 달랠 수 있는 장소는 오직 자습실뿐이라고 그녀는 확인했다.
그녀는 중학교 때에도 등교시간에 거의 딱 맞춰서 등교했었다. 어느 날 입학 초에 빗소리에 눈이 일찍 떠져, 학교를 1시간 일찍 등교한 날이 있었다. 그날은 비가 쏟아져 우산으로는 피하기 어려웠다. 그녀의 머리와 몸에는 자습실에 향했던 그녀는 자신의 옆 좌석에 그가 앉아있었던 것을 발견했다. 바로 입학식날 이야기를 나눴던 시우였다. 벚나무를 바라보는 그는 매우 인상 깊었다. 하지만 자습실에선 벚나무의 당사자는 집중하고 있었던 탓인지, 이쪽에서 말을 걸 기미가 들진 않았다. 자리에 앉아 수학문제를 꺼내 풀었다. 하지만 새벽이라 문제가 잘 풀리지 않았다. 옆에서 시우의 한마디가 귓가에 들려왔다.
"민서야. 머리가 젖어있으면 감기 걸려. "
자연스레 목소리의 방향을 바라봤다. 시우는 손수건을 건네고 있었다.
"앗.... 손수건 고마워. "
그의 호의를 얼빠진 대답으로 답했다.
집중이 되지 않던 차에 감사를 표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민서는 잠시 손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몸도 마음도 진정시켰다.
"안녕. 오늘도 시우는 부지런하구나."
그때부터 시우를 본격적으로 의식하게 됐다. 처음에는 그저 벚나무를 좋아하는 아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무방비한 상태에서 기습을 당해버린 것이 그의 호감으로 이어졌다. 그 이후로 민서는 8시에 맞춰 등교하던 습관을 버렸다. 대신 아침 햇살과 시간을 맞춰 7시에 학교 자습실에 도착했다. 시우는 언제나 자습실에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를 바라보는 민서의 시선은 따뜻해졌다. 이 행복이 3학년부터 이어지지 않았던 것이 민서에겐 매우 유감이었다.
그와의 추억을 되새기며 자습실을 바라봤다. 졸업식이 끝난 이후라 학생들은 전부 바깥으로 나간 상태였다. 자습실엔 그녀 혼자 서 있었다 그녀의 그림자는 그녀의 지정석 앞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이민서> 이름표가 책상에는 이전에 없었던 무언가가 올려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게 뭐지? 쪽지? “
노트를 찢은 것처럼 보이는 쪽지 겉면에는 아무 내용도 쓰여있지 않았다. 접혀있는 쪽지를 조심스럽게 펼쳐보았다. 종이에도 똑같이 아무 내용도 역시 쓰여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종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창가 자리에 있었던 그녀의 책상에 아침 햇살이 비쳤다. 갑자기 그녀는 쪽지를 두고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이미 시간이 지워버린 보물지도를 발견한 어린아이 와도 같았다. 그녀의 입꼬리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지금까지 잃어버린 퍼즐 한 조각을 찾은 것처럼 보였다.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한편 민정이는 그 이후 10분 동안 민서를 기다렸다. 처음에는 두고 온 것을 가져온다고만 했으니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분침의 째깍 소리가 들릴수록 친구가 오지 않아 초조해졌다. 손목시계는 어느새 11시 20분을 가리켰다. 민서에게 전화를 몇 번 해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그녀는 직접 자습실까지 걸어갔다. 하지만 민서는 자습실 구석구석을 찾아도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뭐야, 물건만 가지고 온다고 했으면서!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
그러다 민서의 책상에 올려져 있는 한 종이를 발견했다.
종이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누가 노트로 딱지라도 접었어? 왜 이리 구겨져 있어? “
민정이는 민서와 달리 종이를 봐도 아무 감흥이 들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는 그것이 쪽지를 편 종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종이에는 양면에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민서가 어디로 갔는지가 그녀의 주 관심사였다. 그녀는 자습실을 뒤로하고 민서의 3학년 교실로 향했다. 그곳에도 두고 온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 판단은 현실과는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