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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쓰 Oct 01. 2023

기화펜 러브레터 -7-

여러 가지 해답과 하나의 정답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이미 강당에 앉아있다. 졸업식은 벌써 무르익은 듯하다. 상장 수여에 이어 교장 선생님 말씀으로 이어진다. 전국의 교장 선생님은 똑같은지, 훈화는 언제나 지루하기만 하다. 외부인 좌석을 살펴보니 단골 문방구 아저씨가 보였다. 아저씨와 눈이 맞자 몰래 손을 흔들어 인사한다. 보나 마나 심심해서 학교 졸업식을 오셨겠지. 그래도 어제 있었던 약속을 지킨 아저씨가 고마웠다.


문방구 아저씨는 내 뒤틀린 짝사랑의 해답을 주신 분이다. 인간관계에서는 여러 가지 문제와 해답이 있다. 그 해답이 정답이라는 보장은 없다. 너무 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저 좋은 결과가 나오길 기도하는 법밖에 알 길이 없다. 나는 지금도 문방구 아저씨의 조언이 나를 정답에 가장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직접 고백할 용기를 심어줬기 때문이다. 물론 문방구 아저씨는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난 분명히 아저씨 덕분에 고백을 결심할 수 있었다. 졸업식 시작 하루 전, 나는 여느 때처럼 문방구에 향했다. 단골 문방구 아저씨가 날 반겨주었다. 


“아저씨, 오랜만이에요.”

“시우 왔냐, 언제나처럼 HB 샤프심 사러 온 거냐?”

“아 네, 근데 오늘은 하나 더 사러 왔어요. 기화 잉크가 있을까요?”

아저씨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무슨 바람이 분 거냐, 졸업생이 잉크를? 좋아, 졸업 선물로 기화 잉크는 무료로 주마.”

“감사합니다!”


인심이 좋은 문방구 아저씨와 친해서 다행이었다. 평소보다 활기찬 인사를 드리며 가방에 잉크를 넣었다. 아저씨는 그것을 바라보면서 넌지시 말했다. 


“근데 말이야, 난 개인적으로 기화펜을 싫어한다.”

“왜 그런가요? 노트에 흔적이 남지 않아서 편하던데요.”

아저씨는 기화 잉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거 반대로 말하면 노트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 거지? 그러면 내 노력이 날아간 것 같잖냐.”

“노력이 날아간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매일 밤 쓰는 기화펜 러브레터가 떠올랐다. 아무에게도 전해지지 않을, 그저 쓰고 있는 동안만 의미가 있는 그 러브레터를 문방구 아저씨가 말하는 것 같았다. 

일단 마무리를 지어 인사를 드렸다.

“감사합니다. 혹시 내일 있을 학교 졸업식도 오시나요?”

“너희 학교는 단골이 많으니까 고민 좀 해보련다. 심심하면 한 번 가볼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내일 학교에서 봬요.”

“자식아, 시간 되면 간다고 했잖냐. 하여튼 잘 가라!” 


아저씨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날 배웅했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한 문장이 머리를 맴돌았다. ‘노력이 날아간다.’라는 표현이 참 기억에 남았다. 기화가 되는 현상을 노력에 빗대서 말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매일 기화펜으로 사랑의 문장을 썼던 나날을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적은 글은 전부 기화가 된 셈이다. 즉, 내 사랑의 표현은 흔적도 남지 않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녀와의 관계를 깨고 싶지 않은 소망에서 시작한 행동이었다. 기화펜 러브레터는 분명 충동과 현실을 타협한 최적의 해답이었을 터였다.


하지만 수험 생활이 끝난 지금도, 계속 기화펜으로 글을 적는 것은, 그것은 고백할 용기가 없는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것이 아닐까. 기화펜 러브레터는 내 충동을 확실히 해결해 주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커지는 불만과 감정을 전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기혐오는 커져만 갔다. 생각에 잠긴 상태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저 푸른 하늘은 한없이 넓었지만, 내 마음은 밝진 않았다. 


집에 돌아온 이후에도 나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서 생각을 이어갔다. 처음에는 고등학교 생활 내내 고백하지 못한 자신이 한심했다. 다음은 선생님의 한마디와 상현이와 상담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지금은 수험생활도 끝났으니 내 고백을 막는 요인은 어느 것도 없다. 


짝사랑의 정답은 고백을 성공하는 것 하나이다. 그 과정은 여러 가지가 있을 터이다. 하지만 기존의 기화펜 러브레터는 결국 상대방에게 닿지 않는 방법이다. 나는 현실에 부딪혀 이 해답이 정답일 것이라고 자신을 기만했다. 문방구 아저씨의 한마디는 내 해답의 모순을 지적했다. 내가 아무리 마음을 표현해도 결국은 민서는 모를 것이라는 사실을. 그럼 내일 해야 할 행동은 하나뿐이었다. 직접 민서에게 마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렇게 결심한 이후 나는 러브레터를 작성했던 노트를 펼쳤다. 기화펜이 닿았던 페이지를 망설임 없이 찢었다.

마지막까지 그녀를 향한 내 마음마저 기화되긴 싫었다. 3학년 초부터 제자리걸음이었던 내 마음이 성장한 느낌이 들었다. 기존의 방식을 탈피할 용기를 준 문방구 아저씨에게 고맙다고 혼자 중얼거렸다. 그분은 그저 자신의 생각을 말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직접 고백하는 것이 정답에 가장 가까운 해답일 것이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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