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무쓰 Oct 08. 2023

일말상초 때 헤어진 사람의 기억 3

겨울과 이별 모두 차갑다

첫눈이 내리는 12월이 찾아왔다.

순찰을 돌면 부대 안에서도 캐럴이 울려 퍼지는 시기.

나와 동기는 하늘에서 내리는 하얀 쓰레기를 치웠다. 시간감각은 진작 무뎌졌다. 느껴지는 것은 오직 손에 쥔 삽자루뿐. 새벽부터 눈을 치우다 보니 어느새 해가 중천이었다. 우리는 잠시 사무실로 돌아와 몸을 녹였다.


신기하게 동기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의 눈은 공허로 가득했다. 누가 말을 걸어도 2음절 이상 대답하지 않았자. 농담투성이인 그가 침묵을 유지하는 건 나도 견디기 힘들었다. 그와 친했던 나도 곤란해하니 부서원들은 두 손 다 들었다. 그렇게 수 분이 지나고, 침묵을 못 견딘 선임 한 명이 동기에게 물었다.


"뭔 일 있냐? 왜 그래. "


"..........."


"야, 말 좀 해봐! "


"헤어졌어요..... "


"뭐라고? "


"씨 X, 여자친구랑 헤어졌다고요! 내가 헤어지자 말했어요. "


그의 통렬한 외침에 선임은 그 자리에서 얼었다. 사무실은 한층 무거운 분위기에 잠겼다. 내 입에선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무엇을 말해야 그를 위로할 수 있을까. 여자친구 하나 없던 내가 그 아픔을 과연 알까. 천생연분이라 생각한 그 두 조합이, 이렇게 이렇게 무참히 깨질 수 있단 말인가. 내 머릿속에는 훈련소에서 동기가 전화하던 기억이 영상처럼 재생됐다. 얼마나 사랑스럽던 표현이 수화기에 담겨있던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어야 둘이 깨질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동기가 먼저 통보했다고? 내 머리의 영상은 내 잡생각과  섞여 혼란으로 가득 찼다.


동기는 그저 의자 앉은 상태로 고개를 숙였다. 누가 이 분위기를 깰 수 있을까. 수 초 후 누군가 내 예상을 가볍게 짓밟고 침묵을 깼다.


"와 이 화보 수위 미쳤다, 다들 여기 보... 실...."


그 주인공은 맥심에 집중했던 내 맞후임이었다. 그는 집중력이 좋기로 정평이 나있다. 그 장점이 지금은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모두가 후임을 쳐다봤다. 후임의 표정은 물음표로 가득 차 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

"니 맞선임 헤어졌단다. "

"앗"


갑자기 모두 웃음을 참지 못했다. 여자친구가 헤어진 사람 앞에서 맥심을 보고 감탄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진짜 이 상황이 거짓말 같았다. 모두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동기의 웃음소리가 가장 컸다. 그 웃음소리에는 순도 100%의 어이없음이었다.


"맞지, 내가 여자친구와 헤어졌어도 웃어야지!"


그의 얼빠진 이별을 웃음으로 바꿨다. 마침 TV에는 캐럴이 다시 울려 퍼졌다. 차갑던 분위기라는 이름의 눈은 이렇게 따뜻한 웃음에 눈물로 녹았다. 그는 눈물이 날 정도로 웃고, 기운을 차렸다.


"나중에 정리가 되면 말할게요. 지금은 제설하러 가죠?"


이 종 잡을 수 없는 상황을 환기하기 위해 모두는 삽자루를 다시 쥐고 바깥을 나갔다. 아까와 달리 동기는 말 수가 확연히 늘었다. 여느 때처럼 사회성 넘치는 농담이 그를 둘러쌌다. 그렇게 차갑고도 더웠던 겨울 아침이 지나갔다.






작가의 이전글 일말상초 때 헤어진 사람의 기억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