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앞에서 무너지는 매 순간 떠오르는 시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by 문인선
나도 옥자가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201708



화는 화가 난 대상에게 정확히 꽂혀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무관하고 무고한, 주위의 가깝고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그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정확한 대상에게 적절한 화를 내며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내부적 원칙,
스스로 내린 정의를
무참하게 무너지게 하는 순간이
바로 00 앞이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아저씨가
갈비탕집 주인 아줌마에게 욕하고 있는
자신을 마주하고
참담하게 무너진 자기 마음을
스스로 위로 조차 못하고 더 할퀴면서
자기 자신을 하찮아 하는
그 마음 떠오르는

오늘


진짜 별로다.




201708



#mooninsun
#그리고요가하는일상 #꾸준한그림
#옥자 #okja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 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삼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 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앞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뭇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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