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조품

by 책방별곡

중학교 2학년, 칠판 앞에서 유창하게 말을 이어가던 영어 선생님은 내게 '혼자 떠나는 여행'이라는 가능성을 처음 보여준 사람이었다. 누군가의 허락도, 동행도 필요 없이 그저 원하면 훌쩍 떠나버릴 수 있는 그녀의 자유를 동경했다.

그녀가 말한 많은 여행지 중 가장 내 마음을 흔든 곳은 유럽이었다. 에펠탑 전망대에 올라가 파리의 일렁거리는 야경을 보고 싶었다.

대학생이 되면 3개월 정도 아르바이트비를 모아서 비행기를 탈 줄 알았다. 파리, 런던, 프라하는 이름만 들어도 심장이 뛰던 도시들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늘 상상보다 더 투박하고 더 거칠었다. 아버지의 사업이 무너지고 집안은 빚으로 뒤덮였다. 여행은 커녕 하루하루를 버티는 일이 중요해졌다. 유럽은 멀어졌고 나는 책상 앞에 묶였다. 누군가의 미래를 따라가는 동안 오랜 꿈은 조용히 잊혀졌다.

그러다 올해 1월, 스물몇 해 묵은 '유럽'이라는 단어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내가 간 곳은 파리도 런던도 아니었다. 유럽의 모양을 빌려온 작은 섬, 마카오였다. 마카오의 랜드마크인 에펠탑 앞에 섰을 때 조명은 눈을 찌를 만큼 밝았고 철제 프레임은 손끝으로 만지면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을 것 같은 어중간한 온기를 내뿜고 있었다. 조명이 깜박일 때마다 진짜가 내뿜는 묵직한 시간의 감각 대신, 쇼윈도 속 장식품 같은 가벼움이 보였다.

그 앞에서 누군가는 라이브 방송을 켰고 누군가는 포즈를 바꿔가며 셔터를 눌렀다. 그 모든 장면이 하나의 배경세트 위에서 이루어지는 연극 같았다. 나도 이 풍경 속에서 '유럽에 처음 온 사람' 역할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탑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묘하게 복잡했다. 화려한 조명이 나를 향해 쏟아져 오는데 그 빛이 속 깊이까지 들어오지 못하고 겉에서만 번쩍거리는 느낌이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갖고 싶어 했던 명품 가방을 대신해서 비슷하게 생긴 모조품을 들었을 때의 기분처럼 화려한데 어딘가 헛헛했다.

철제 탑을 올려다보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정말 유럽을 보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유럽을 꿈꾸던 나를 다시 만나고 싶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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