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흐려져도 사랑만은.
사람은 때때로 삶의 균열을 잊는 쪽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영화 계춘할망을 보는 동안 그런 생각이 오래 머물렀다. 누구보다 단단해 보이는 사람도, 누군가를 잃어버린 시간 앞에서는 쉽게 낡아간다는 사실을 말이다.
실종된 손녀를 십여 년 넘게 기다려온 할망의 삶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시선만으로도 전해지는 외로움이 있었다. 영화가 보여주는 그 외로움은 감정의 과장 없이 잔잔하게 번져서 오히려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
기억이라는 건 참 잔인하다. 사라진 아이에 대한 기억은 삶을 붙드는 끈이 되기도 하고 스스로를 옥죄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계춘할망은 이 흔해 보이는 설정을 진부하게 다루지 않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억지로 치유하지도 않고 누군가의 고통을 서사적 장치로 소비하지도 않는다.
할망의 표정이 참 오래 남는다. 말보다 표정이 먼저 울음을 삼키는 사람이 있다. 잊으려 하면 더 선명해지는 얼굴, 기억을 되짚을 때마다 달라지는 감정의 결, 그 모든 게 고스란히 배우의 움직임에 담겼다. 극적인 대사보다 이런 몸짓과 숨결이 이 영화의 힘이라고 느꼈다.
영화 후반부, 할망이 가짜 손녀와 함께하는 장면에서 마음이 한순간 무너졌다. 피가 섞였다는 이유만으로 생기는 사랑은 흔하지만 기억이 엇갈리고 진실이 뒤섞여도 계속해서 누군가를 향하는 사랑은 쉽지 않다. 계춘할망이 보여준 건 바로 그 쉽지 않은 사랑이었다.
기억이란 완전한 형태로 남는 게 아니라 사랑했던 순간만 골라 붙잡는 건 아닐까? 이 작품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기억이 희미해져도 사랑만은 흐려지지 않는다는 믿음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