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를 사랑한 살리에리
이 영화를 보며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의 나였다.
영화 속 여자는 기대와 다르게 자라나는 자식들을 바라보며 서서히 좌절한다. 짐작해 본다. 한때는 무언가를 쓰던 사람이었고 자기 안에 창작의 불씨가 있다고 믿었던 여자였겠지. 아이를 낳고 키우는 동안 글은 뒤로 밀리고 재능은 '가능성'이라는 이름으로만 남았을 듯. 현실은 반복되고 성취는 없고 어느 순간 자신이 무엇을 좋아했는지조차 흐릿해진다.
그런 여자의 눈에 천재성을 보이는 아이가 들어온다. 아이의 시는 날것이고 계산이 없고 무엇보다 아직 닳지 않았다.
그 순간 여자는 아이를 보는 동시에 자신이 되지 못한 어떤 모습을 본다. 아이에게 집착하는 여자는 보호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만 사실은 자기 구원에 가깝다. 아이의 재능을 밀어주는 행위는 실패했다고 믿는 자기 삶을 보상받으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영화를 보며 불편했던 이유는 그 여자가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대만큼 자라주지 않는 아들을 보며 느끼는 서운함..
"내가 뭘 잘못했나?"라는 질문 대신
"왜 너는 내가 상상한 모습이 아니니?"라고 묻고 싶은 순간들이 떠오른다.
지금의 나는 주인공만큼 극단적이지는 않다.
아이에게 재능을 강요하지도 않고 대신 살아주길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아이가 무언가를 잘할 때 잠깐 스스로가 구원받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 감정이 이 영화와 나를 연결한다.
주인공을 보며 어른의 결핍이 얼마나 쉽게 아이의 재능에 달라붙는지를 생각한다. 아이의 가능성 앞에서 흥분하기 전에, 아이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전에, 내가 아직 정리하지 못한 좌절과 미련은 무엇인가 생각하자.
아이에게서 답을 찾지 않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