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언 반스 [[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 ]]

타인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의 '우아한 실패'

by 책방별곡

​누구나 인생에 한 번쯤은 그런 스승을 만난다. 뜨거운 열정으로 등을 떠미는 사람이 아니라 서늘한 지성으로 우리를 멈춰 세우는 사람. 줄리언 반스의 《엘리자베스 핀치》를 읽는 내내 나는 기억 속 어딘가에 묻어두었던 '어른'의 모습을 떠올려야 했다.

​이 소설은 '문화와 문명'이라는, 다소 고리타분한 이름의 성인 강좌를 맡은 강사 '엘리자베스 핀치(EF)'와 그녀를 평생 흠모하고 탐구했던 제자 닐의 이야기다. 하지만 이것은 흔한 사제 간의 로맨스도, 감동적인 휴먼 드라마도 아니다. 오히려 지극히 건조하고 때로는 신경질적일 만큼 정교하게 축조된 '지적 미스터리'에 가깝다.
​그녀의 강의는 답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고 합의된 역사가 아니라 잊힌 패배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과정이었다. 닐은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가 남긴 노트와 편지를 통해 '진짜 엘리자베스 핀치'를 재구성하려 애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그녀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갈수록 그녀는 점점 더 모호한 안갯속으로 사라진다.


​작가는 이 건조한 서사를 통해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타인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가? 우리가 안다고 믿는 누군가의 모습은 실은 나의 결핍이 만들어낸 환상은 아닌가? 닐이 쓴 에세이가 결국 엘리자베스 핀치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닐 자신의 투영이었듯, 우리가 타인을 읽는 행위는 결국 나 자신을 읽는 행위로 귀결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책을 덮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헛헛하면서도 기묘한 해방감이 든다.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 그 실패를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오늘 밤은 정답을 찾으려 애쓰기보다 해결되지 않은 질문들을 가만히 껴안고 잠들고 싶다. 엘리자베스 핀치가 그러했듯이, 우아하고 고독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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