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행복, 그 숨 막히는 감옥
우리는 종종 '완벽한 삶'이라는 설계도를 그린다. 번듯한 직장, 다정한 배우자, 사랑스러운 아이들, 그리고 정원 딸린 안락한 집. 이 모든 조건이 퍼즐처럼 맞춰졌을 때 마땅히 행복해야 한다고 믿는다. 아니, 행복하지 않으면 죄라도 짓는 것처럼 스스로를 다그친다.
하지만 도리스 레싱의 단편은 그 견고한 믿음에 서늘하고도 날카로운 균열을 낸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그녀가 그려낸 주인공 수전 롤링스의 삶은 겉보기에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기에 더욱 비극적이다. 이 소설은 단순히 주부의 우울을 다룬 이야기가 아니다. 타인이 규정한 역할에 서서히 잠식당해 결국 자기 자신의 윤곽을 잃어버린 한 인간의 투쟁기다.
수전과 매슈 부부는 스스로를 지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라 자부한다. 그들은 감정의 파도를 이성으로 통제하며 서로를 존중하는 모범적인 결혼 생활을 꾸려간다. 심지어 남편의 외도조차 그들은 "우리가 서로에게 잠시 소홀했던 시기"라며 지성적으로 그리고 쿨하게 넘긴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숨이 막혀오는 이유는 바로 그놈의 '지성' 때문이다. 수전은 자신의 내면에서 피어오르는 알 수 없는 공허와 불안을 합리적인 언어로 설명할 수 없어 괴로워한다. 엄마로서, 아내로서의 역할은 완벽하게 연기하고 있지만 정작 그 속에서 '수전'이라는 고유한 존재는 증발해 가고 있었다. 그녀는 모두가 내게서 뜯어먹을 것을 가져가고 난 뒤 껍데기만 남은 기분을 느낀다. 이것은 비단 소설 속 수전만의 이야기일까? 직장에서, 가정에서, 수많은 관계의 거미줄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나를 지우고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가?
수전은 이 숨 막히는 공허를 채우기 위해 집 안에 '어머니의 방'을 만든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공간. 하지만 가족들은 그 공간조차 침범한다. 문은 열리고 아이들은 뛰어 들어오고 남편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노크를 한다. 집이라는 공간 안에서 그녀는 결코 누구의 엄마나 누구의 아내라는 꼬리표를 뗄 수 없었다. 결국 그녀가 도망치듯 찾아낸 곳은 도심의 허름하고 지저분한 싸구려 호텔의 19호실이었다. 그곳에는 그녀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녀에게 빨래를 요구하지도 저녁 메뉴를 묻지도 사랑을 갈구하지도 않는다. 그 낡은 벽지 속에 갇혀 수전은 멍하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비로소 숨을 쉰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아무도 되지 않을 자유를 만끽한다. 19호실은 그녀가 유일하게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장소였다.
소설의 결말은 서늘하다. 남편에게 그 방의 존재를 들키자(심지어 남편은 그녀가 외도를 한다고 오해하고 수전은 그 오해를 긍정해 버린다) 그녀는 자신의 공간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진 수전은 19호실에서 가스를 틀고 영원한 안식을 택한다. 수전이 죽음을 택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없었을까? 하지만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19호실'이 절실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리적인 공간일 수도 있고 퇴근길 차 안에서의 고요한 10분일 수도 있으며 새벽녘 모두가 잠든 시간에 마시는 차 한 잔의 시간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타인의 시선과 요구가 완전히 차단된 온전히 나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다.
지금 브런치에 글을 쓰는 이 시간, 어쩌면 이곳이 나의 19호실일지도 모르겠다.
당신의 삶은 완벽한가?수전의 비극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묵직하다.
"지금 당신에게는 당신 자신이 될 자유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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