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문장은 최진영 작가님의 홈스위트홈 문장을 변형했습니다.>
기억 속 최초의 집에는 반지하 창문 너머로 보이는 주인집의 꽃들이 만발한 정원이 있었다. 어린 나의 세계는 딱 그 창문의 높이만큼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고개를 한껏 젖혀야만 볼 수 있는 붉은 장미와 노란 수선화는 손에 닿지 않는 천국 같았고 비가 오는 날이면 젖은 흙냄새가 창살을 타고 내려와 방 안의 눅눅한 공기와 섞이곤 했다.
그 정원은 늘 위에 있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풍경은 언제나 반 박자 늦었고 반쯤 가려져 있었다. 창살 사이로 잘린 하늘, 화단 가장자리만 보이는 꽃들. 계절은 늘 누군가의 발자국과 함께 도착했다. 봄은 주인집 아주머니가 화분을 옮기는 소리로, 여름은 호스로 물을 뿌리는 소리로 먼저 알았다. 나는 계절을 보는 아이가 아니라 듣는 아이였다.
정원은 매일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매일 같은 얼굴은 아니었다. 어떤 날은 꽃잎이 과하게 벌어져 있었고 어떤 날은 비에 눌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의 하루는 그 작은 차이들로 채워졌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장 먼저 창가로 갔다. 오늘의 천국은 어제보다 조금 더 가까운지, 아니면 더 멀어졌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비 오는 날의 냄새는 아직도 선명하다. 눅눅한 벽지의 곰팡이 냄새, 축축한 양말의 고린내, 지리멸렬한 부부싸움 끝 뒤엎어지는 김치의 쉰내가 벽지에 배인 냄새, 그리고 비린내 나는 흙냄새까지. 흙냄새는 이상하게도 마음을 가라앉혔다. 주인집의 꽃들이었고 관리도 다른 사람이 했지만 그 풍경을 가장 오래 빨아들인 사람은 나였다.
시간이 흘러 반지하를 떠났다. 결혼 후 햇볕이 잘 드는 집에 살게 되었을 때조차 자주 창문의 위를 바라봤다. 시선은 습관처럼 높은 곳에 머물렀다. 사람은 자신이 자라온 높이에서 세상을 본다. 그것은 선택이라기보다 체형에 가깝다.
반지하의 창문은 낮았기에 시선은 늘 위로 향해 있었다. 창문의 위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상상한다. 언젠가 정원이 있는 집에서 사는 나를. 으리으리한 저택이 아니어도 좋다. 현관을 열고 나가면 맨발로 밟을 수 있는 작은 정원이 있는 집이면 족하다. 그곳에서 어린 시절 그토록 올려다보기만 했던 붉은 장미를 심고 싶다. 노란 수선화 곁에는 핑크 빛 수국도 심어야지. 비가 오는 날이면 창문을 닫는 대신 우산을 쓰고 마당으로 나가 빗방울이 잎사귀를 두드리는 소리도 듣는다. 토도톡. 창살 틈으로 흘러들던 눅눅함이 아니라 정원의 흙이 숨 쉬는 향기를 깊이 들이마시고 싶다.
정원 한구석에는 작은 나무 의자를 하나 놓을 생각이다. 그곳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바람에 흔들리는 초록 잎사귀들이 반겨주기를 바란다. 그 정원에서 나는 더 이상 닿을 수 없는 곳을 동경하던 어린아이가 아니다. 흙을 만지고 물을 주며 천국을 직접 가꾸어가는 사람이 미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