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왔습니다, 인애씨 - 1화

by 책방별곡

이번에도 초단편소설을 써봤습니다.




​나는 정원이 되었다. 차라리 한 줌의 재가 되어 강물에 뿌려졌다면 좋았을 것을. 내가 공들여 가꾸었던 이 집의 정원, 그 한가운데 우뚝 선 벚나무 아래 묻혔다. 흙은 차갑고 무거웠으며 어둠은 끈적했다. 육신이 썩어 문드러져 흙으로 돌아가는 동안, 영혼은 벚나무의 단단한 뿌리에 얽혀 들었다. 내 이름은 인애(仁愛). 어질게 사랑하며 살다 가라는 이름을 받았으나 열여섯 아들 우영을 두고 눈을 감는 순간에 어짊도 사랑도 부질없는 형벌이었다.
​저승의 문턱에서 나는 염치 불고하고 매달렸다. 아이가 자라는 것을 한 번만이라도 더 보게 해달라고. 그 간절함이 통했는지, 혹은 질긴 미련에 대한 벌인지 모를 허락이 떨어졌다. 지상의 중력이 가장 약해지고 생명이 폭발하듯 만개하는 4월의 봄날 중 5번만 벚나무의 수관을 타고 올라와 세상을 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가장 화려한 감옥에 갇힌 수인이 되어 다섯 번의 봄을 기다리게 되었다.
​[우영, 16세: 날 선 슬픔의 정원]
​첫 번째 봄,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을 뚫고 올라오는 수액의 힘겨운 박동을 느끼며 눈을 떴다. 딱딱한 나무껍질을 찢고 연분홍 꽃봉오리를 터뜨리는 고통은 산통과 비슷했다. 세상은 온통 아찔한 분홍빛으로 현기증이 일었다. 그 꽃그늘 아래, 내 아가 우영이 서 있었다.
​아직 채 여물지 않은 턱선에는 거뭇한 솜털이 듬성듬성했고 목울대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불거져 있었다. 아이는 온몸으로 가시를 세우고 있었다. 깡마른 몸에 헐렁한 교복 재킷, 소매 끝으로 삐져나온 손목뼈가 애처로울 만큼 도드라졌다. 우영의 눈은 세상 모든 것을 저주하는 듯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아이에게서 풍겨오는 비릿한 땀 냄새와 싸구려 비누 향이 바람을 타고 내게 닿았다. 정원은 주인을 잃은 티가 역력했다. 애지중지하던 수국 화분은 말라비틀어졌고 잔디밭 사이사이에는 잡초가 제멋대로 자라났다. 우영은 그 황량한 정원 한가운데서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징그럽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젠장, 뭐가 좋다고 이렇게 피어. 엄마는 없는데…”
​우영이 신경질적으로 벚나무 줄기를 걷어찼다. 쿵. 나무 전체가 울렸다. 영혼이 휘청거렸다. 나무의 통증보다는 아이의 낡은 운동화 코에 묻은 흙이 내 살점 같아 아렸다. 우영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더니 이내 거친 나무껍질에 이마를 쿵, 대고는 짐승처럼 울부짖기 시작했다.
​“… 엄마. 거긴 천국이야? 나는 어떡해? 아침에 깨워주는 사람도 없고… 근데 꽃은 왜 이렇게 예쁘게 피고 지랄인데!”
​아이의 뜨거운 눈물이 나무를 타고 흘러내려 내 영혼을 적셨다. 만지고 싶었다. 저 앙상한 어깨를 감싸 안고 까까머리 정수리에 입 맞추고 싶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온 힘을 다해 가지를 흔들어 흩날리는 꽃잎 몇 장을 아이의 어깨 위에 눈물처럼 떨어뜨리는 것뿐이었다. 첫 번째 봄은 시리게 끝났다.
​[우영, 24세: 수줍은 생의 한가운데]
​여덟 번의 겨울과 여덟 번의 봄이 지났다. 정원은 조금 안정을 찾은 듯했다. 누군가 서툴게나마 잡초를 뽑고 가지를 친 흔적이 보였다. 벚나무는 제법 둥치가 굵어졌고 가지는 담장을 넘어 흙길까지 그림자를 드리울 만큼 풍성해졌다. 나무 아래 선 청년은 더 이상 교복을 입은 소년이 아니었다. 어색하지만 제법 태가 나는 저렴한 양복을 입은 우영은 사내의 냄새를 풍겼다. 넓어진 어깨와 단단해진 턱선, 면도를 한 말끔한 뺨에서 옅은 스킨 향이 났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맑은 눈을 가진 단발머리 아가씨가 그의 곁에서 수줍게 웃고 있었다. 우영은 잔뜩 긴장했는지 넥타이를 자꾸만 만지작거렸다.
​“여기가… 우리 엄마 계신 곳이야. 내가 말했던 그 벚나무.”
​우영의 목소리가 한결 낮고 단단해져 있었다. 그는 쑥스러운 듯 헛기침을 하더니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아 순간 수관의 수액이 빠르게 요동쳤다.
​“엄마, 나 왔어. 여긴 희수야. 내가… 많이 좋아하는 사람. 인사시켜주려고.”
​아가씨가 나무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우영 씨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정원이 정말 아름다워요. 어머니가 계신 곳이라 그런가 봐요.”
​우영이 조심스럽게 여자의 손을 잡았다. 그의 귀와 목덜미가 벚꽃잎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엄마, 나 이 사람이랑 잘해보고 싶어. 엄마가 좀 도와줘. 알았지?”
​대답 대신 나는 바람을 불렀다. 가지 끝에 매달려 있던 가장 곱고 싱싱한 꽃잎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분홍색 꽃비가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축복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래, 뜨겁게 사랑하고 사랑받거라. 가슴 한구석이 시큰했지만 그것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기분 좋은 통증이었다.




이전 12화그 시절 닿을 수 없던 천국을 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