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왔습니다, 인애 씨 - 2화

초단편소설을 써봤습니다.

by 책방별곡

[ 우영, 45세: 삶의 무게에 짓눌린 오후 ]
​시간은 가속이 붙은 듯 빠르게 흘렀다. 스물아홉 번째 봄, 정원의 풍경은 스산했다. 담벼락의 페인트는 군데군데 벗겨졌고 내가 아끼던 채송화밭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시멘트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오직 벚나무만이 거대한 괴물처럼 자라나 정원의 절반을 그늘로 뒤덮고 있었다.
​나무 그늘 아래 선 남자는 중년의 무게를 힘겹게 짊어지고 있었다. 우영의 윤기 나던 머리칼에는 희끗희끗한 눈이 내렸고, 미간에는 깊은 ‘내 천(川)’ 자 주름이 패여 있었다. 양복은 구겨졌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헤친 채 한 손에는 서류 가방을 다른 한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그는 털썩, 나무뿌리 위에 주저앉았다. 내가 묻힌 바로 그 자리였다. 비닐봉지에서 꺼낸 것은 미지근해진 캔맥주였다.
​“하아… 엄마. 사는 게 참, 거지 같네.”
​맥주 캔 따는 소리가 날카롭게 정적을 깼다. 그는 벌컥벌컥 술을 들이켜고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는 16살 때의 분노 대신 삶에 지친 권태와 피로로 탁하게 물들어 있었다.
​“희수는 애들 교육비 때문에 나만 보면 돈타령이야. 회사에서는 부장 놈이 젊은 애들 앞에서 날 얼마나 쪼아대는지… 내가 지금 뭘 위해 사는지 모르겠어. 엄마는 어떻게 버텼어? 그 지긋지긋한 세월을.”
​그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구부정한 등이 너무 작고 고단해 보여 나는 잎사귀를 비벼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괜찮다, 아들아. 다 지나간단다. 조금만 더 견디렴.
​“있잖아, 엄마. 나 어릴 때 엄마가 끓여주던 삼겹살 김치찜이 너무 먹고 싶다. 그 맛이 도저히 안 나. 어디서 사 먹어도.”
​우영이 거칠고 두꺼워진 손바닥으로 나무줄기를 쓸어내렸다. 그 투박한 손길에서 아이의 고단한 삶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우영, 68세: 저물어가는 빛 속에서]
​정원은 이제 주인의 손길이 닿지 않은 지 오래된 듯했다. 잡초는 무성하게 자라 내 허리춤까지 올라왔고, 담장은 금이 가 위태로워 보였다. 벚나무 또한 병들었다. 가지 곳곳이 말라비틀어졌고 꽃송이는 예전처럼 풍성하지 못하고 드문드문 피어났다. 수액을 올리는 일이 숨이 찼다.
​나무 아래 노신사가 서 있었다. 머리는 완전히 백발이었고 검버섯이 핀 얼굴의 피부는 늘어져 있었다. 그는 얼마 전 희수를 먼저 떠나보내고 혼자가 되었다고 했다.
​우영은 발바닥으로 마른땅을 톡톡 두드렸다. 그 소리가 마치 내 심장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어머니, 저 왔습니다. 올해 벚꽃은 유난히 힘이 없어 보이네요. 저처럼.”
​그의 말투는 어릴 적 투정 부리던 말투가 아니었다. 삶의 모든 파도를 다 넘고 난 뒤에 찾아오는 잔잔한 바다 같은 담담함이 배어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낡고 빛바랜 사진 한 장을 꺼내 나무 둥치에 기대어 놓았다. 나와 어린 우영이 이 정원에서 함께 찍은 색 바랜 사진이었다.
​“어머니, 그거 아세요? 제가 이제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이보다 스무 살이나 더 먹었어요. 아침에 거울을 보면 깜짝 놀랍니다. 웬 낯선 노인네가 서 있어서요."
​그가 허허롭게 웃었다. 가래 끓는 쇳소리가 섞인 웃음이었다.
​“애들은 다 제 살길 찾아 바쁘고 손주 녀석들도 머리 좀 컸다고 이 늙은이는 찾지도 않네요. 결국 인생은 혼자 왔다 혼자 가는 건가 봅니다.”
​그는 한참 동안 말없이 꽃그늘 아래 앉아 있었다. 따뜻하지만 더 이상 뜨겁지 않은 봄볕이 그의 굽은 등을 어루만졌다. 이제 그에게 해줄 말이 많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말없이 서로의 늙음을 공유했다.


​[우영, 88세: 마지막 귀가]
​일흔두 번째 봄. 정원은 폐허나 다름없었다. 담장은 무너져 내렸고 주인 잃은 집은 흉가처럼 변해 있었다. 벚나무인 나도 이제 수명을 다해가는지 몸통의 절반은 썩어 들어갔고 겨우 살아남은 몇 개의 가지 끝에만 힘겹게 꽃을 매달고 있었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봄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날 오후 낯선 요양보호사의 부축을 받으며 휠체어 하나가 잡초 무성한 정원으로 들어왔다. 휠체어에 앉은 노인은 아주 작고 가벼워 보였다. 뼈만 남은 앙상한 몸, 쪼글쪼글해진 피부, 초점 없이 흐릿한 눈동자. 그가 우영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내 아들은 이제 갓 태어난 아기처럼 작아져 있었다.
​“할아버지, 여기가 좋으세요? 바람이 좀 찬데, 이제 그만 들어가실래요?” 요양보호사가 물었다.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의 흐릿한 시선이 벚나무 꼭대기, 겨우 매달려 있는 몇 송이의 꽃에 머물렀다.
​“… 아니야. 여기… 엄마가 있어.”
​그의 목소리는 다 타버린 재처럼 힘이 없었고, 발음은 부정확했다. 요양보호사는 씁쓸하게 웃으며 잠시 자리를 비켜주었다.
​폐허가 된 정원에는 죽어가는 벚나무와 88세의 아들, 둘만이 남았다. 바람이 불자 마른 가지들이 서로 부딪히며 ‘끼익’하고 울음 같은 소리를 냈다. 우영이 떨리는 손을 들어 허공을 휘저었다. 마치 눈앞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잡으려는 아이처럼.
​“인애 씨.”
​그가 불렀다. 엄마가 아닌, 나의 이름. 72년 만에 처음으로 백발의 아들이 나의 이름을 불렀다. 치매는 그의 기억 속에서 ‘엄마’라는 역할을 지우고 나라는 존재 자체를 남겨둔 모양이었다.
​“인애 씨… 참 곱네. 올해도. 기다리느라… 많이 힘들었지?”
​그의 움푹 팬 눈가에 고인 눈물이 봄 햇살에 반짝였다. 그는 이가 다 빠진 입으로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그 웃음은 16살의 그가 보여주었던 분노보다, 24살의 수줍음보다, 45살의 고단함보다 훨씬 투명했다.
​“나 이제… 숙제 다 한 것 같아. 길고 긴 숙제였어. 이제 학교 다녀왔습니다, 하고… 엄마한테 가도 될 것 같아.”
​그의 고개가 툭, 하고 가슴팍으로 떨어졌다. 아주 깊고 평온한 잠에 빠진 얼굴이었다.
​나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내 몸에 남아있는 모든 생명력을 태워 꽃잎을 떨었다. 수천, 수만 장의 연분홍 꽃비가 휠체어에 앉은 작은 노인의 몸을 덮었다. 그것은 내가 그에게 보내는 마지막 자장가였고 긴 소풍을 마치고 돌아온 내 아들에게 덮어주는 가장 따뜻한 이불이었다.
​나의 긴 형벌이 아니, 나의 긴 사랑이 비로소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내년 봄에는 이 늙은 벚나무도 꽃을 피우지 않을 것이다. 대신 우리는 다른 곳에서 영원히 지지 않는 꽃밭에서 다시 만날 것이다.
​안녕, 나의 우영아. 참 잘 살았다. 어서 오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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