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잠기지 못했다

by 책방별곡

박정민이 연극 무대에 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한동안 설렘 속에 머물렀다. 스크린 속에서 그는 늘 무언가를 증명해 온 배우였다. 그 사람이 카메라의 보호 없이 편집의 도움 없이 오직 몸과 공기만으로 관객과 마주 선다면 어떤 얼굴을 보여줄까?

공연장에 들어서는 순간 〈라이프 오브 파이〉의 무대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처럼 숨 쉬고 있었다. 푸른 조명은 파도처럼 객석까지 번져왔고 배우들의 움직임은 물결처럼 이어졌다.
그리고 리처드 파커. 거대한 호랑이가 무대 위에서 숨을 쉬는 순간 잠시 현실을 잊었다. 몇 사람의 손과 발, 몸짓이 모여 한 마리의 짐승이 되는 장면이 이렇게까지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무대는 바다를 만들어냈다. 그 바다 위에서 파이는 표류하고 있었다. 박정민의 파이는 성실했다.
장면마다 무너지지 않으려는 힘이 느껴졌다.
하지만 무대가 너무 아름다웠던 탓일까.
아니면 연출이 만들어낸 세계가 지나치게 완전해서였을까. 파이의 내면이 풍경 속에서 가끔 희미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감정이 먼저 도착해야 할 자리에 목소리가 먼저 닿는 느낌.
무너져야 할 순간에 버티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공연이 끝나고 조명이 꺼졌다. 사람들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한 박자 늦게 그 흐름에 섞였다. 극장을 나서는 길, 파도는 이미 끝났는데
어딘가에서는 아직도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그 바다의 더 깊은 곳까지 함께 가라앉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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