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영화와 바다 사이

올해의 볼 것들

by 책방별곡

몇 주 후면 흩날리는 벚꽃 비를 다시 보게 될 것이다. 봄은 늘 갑작스럽다. 어느 날 길을 걸으면 꽃이 만개해 있고 또 어느 날은 비처럼 흩어진 꽃잎이 신발 위에 내려앉는다. 여름이 가까워지면 오래된 시간의 꽃을 보러 간다. 김해 수로왕릉의 능소화. 능소화는 화려하지만 소란스럽지 않고 뜨겁지만 조용하다. 담벼락 아래에 주황빛 꽃이 늘어져 있을 때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멍하니 바라보며 우리가 사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고 꽃이 피는 속도는 생각보다 빠르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린다.
극장에 불이 꺼지고 스크린이 켜질 때 2000년대의 어느 날을 떠올릴 것이다. 무려 20년 만에 돌아온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가 4월에 상영된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꽤 다른 사람이 되었지만 주인공 앤디가 다시 등장하는 순간 심장에 불이 켜진다. 시간은 흘렀지만 캐릭터가 여전히 자기 방식으로 살아 있다는 사실이 위로처럼 느껴진다.
여름이 깊어지면 제주도의 바다를 보러 간다. 푸른 바다는 마치 누군가 색을 지우개로 한 번 닦아낸 것처럼 투명하다. 바닷가를 걷다가 어느 순간 산방산이 보이는 카페에 앉는다. 창문 밖에는 묵직한 산이 있고 카메라 렌즈 너머로 그곳을 바라보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 새삼 알게 된다.
가을에는 서울에 갈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원화가 있는 공간에 머물기 위해. 책과 사진으로 수없이 봤던 그림이지만 실제로 보면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면 물감의 결이 보이고 붓의 흔적이 보이고 몇백 년 전 어떤 화가의 숨결이 느껴진다. 그림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말을 잃는다.
겨울엔 바다를 건넌다. 무릎까지 오는 눈이 쌓인 길을 힘겹게 걷다가 오타루 오르골당에 들어가는 장면을 상상한다. 문을 열면 3만 개의 오르골이 나를 유혹한다. 손잡이를 돌리면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오고 셰이렌에 홀린 듯 어느새 계산대 앞에 서 있는 내가 보인다. 2026년에 보게 될 것들은 거창하지 않다. 한 페이지씩 천천히 걸어가 보면 어디선가 미처 생각지도 못 한 장면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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