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면죄부인가?-
너희가 자기들을 의도적으로 꼬셨다고, 너희가 밤늦게 다녔던 게 문제라고, 너희가 옷을 야하게 입었다고, 자기네 잘못을 은폐하려고 모든 게 너희 잘못이라면서 계속 거짓말을 꾸며댈 거야. 절대 거기 넘어가지 마. 다 헛소리야. 그럴 땐 계속 생각해. 미칠 것 같을 때도 계속 생각해. 이런 일 아니더라도 여자로 사는 거 힘들어. 그렇다고 생각하는 걸 멈추면, 그때부터는 진짜 지는 거야.
-『녹즙배달원 강정민』 -
대학교 3학년 1학기 기말고사 기간이었다. 중고등학교 6년을 하기 싫은 공부 억지로 참고했기에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미친 듯이 놀았다. 1, 2학년 때는 수업을 수시로 째버리고 학교 뒤편 금정산성에 올라가 대낮부터 막걸리를 마셨다. 수업을 안 들으니 학점은 1점 후반에서 2점 초반대였고 3학년이 돼서야 취업과 고시라는 갈림길에서 정신을 차렸다. 고시 공부를 3년으로 기간을 잡고 합격을 하지 못하면 취업을 해야 했는데 2점대를 어느 회사에서 뽑아주겠는가? 구멍 난 학점을 메꾸기 위해 시험 기간에는 중앙도서관 문이 닫힐 때까지 공부를 한 후 11시 50분 지하철 막차를 탔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6월의 무더운 밤 형법, 민법, 헌법 등등 각종 법률에 찌든 몸을 이끌고 양정역 2번 출구에서 내렸다. 더위를 못 견뎌하고 땀도 많이 흘리는 체질이다. 중앙도서관은 에어컨이 잘 나오지 않아 밥을 먹고 자리에 앉으면 숨이 턱턱 막혔다. 조금이라도 시원하게 있고 싶어서 무릎 위로 10센티미터 올라간 짧은 치마에 가슴골이 파인 반팔티를 입고 있었다. (누구 말마따나 옷을 조신하게 입지 않아서 그런 일이 일어났던 걸까?)
귀가시간이 밤 9시가 넘는 날에는 컴컴한 지름길을 놔두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대로변으로 돌아서 다녔다. 그러나 그날은 도서관 자리를 맡는다고 새벽 5시에 일어났던 체력이 한계에 다다랐다. 빨리 집에 가서 씻는 것도 생략한 채 이불에 몸을 뉘이고 싶었다. 진이 빠지고 눈꺼풀이 무거웠다.
지하철 출구로 나와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로등 불이 거의 켜져 있지 않는 좁은 골목길, 집에 빨리 갈 수 있는 지름길이 보였다. 시작점에서 쳐다보는 길은 칠흑같이 어둡고 밤 12시가 넘었으니 사람이 한 명도 다니지 않았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범죄현장같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뉴스에 나오는 그런 일 없었는데 괜찮겠지? 무섭지만 10분만 걸으면 집이니 빠른 걸음으로 가보자. 내일도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하잖아.’
겁쟁이 쫄보가 무서움보다는 기말고사 성적을 택했다. 마음속으로 아무 일 없어라 아무 일 없어라 계속 주문을 외우며 한걸음 한걸음 달리기 하듯이 걸어갔다.
‘인상 좋아 보이는 아줌마라도 한 명 같이 걸어가면 덜 무서울 텐데.’
핸드폰을 손에 꼭 쥔 채 당시 좋아했던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마음 울적한 날에 거리를 걸어보고 향기로운 칵테일에 취해도 보고 한 편의 시가 있는 전시회장도 가고~.”
그 순간 오른쪽으로 빠지는 갈림길에서 시커먼 물체가 튀어나왔다. 너무 놀라니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술에 취해 눈이 반쯤 풀린 휘청거리는 남자였다. 갑자기 놀라거나 당황하면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는 고등학교 때 받았던 성교육이 떠올랐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개를 돌리고 걸어갔다. 달리지도 않았다. 핸드폰을 떨어 뜨릴 것 같이 두 손이 떨렸지만 겁을 먹었다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남자는 내 뒤를 천천히 따라오기 시작했다.
‘자기 집 가는 거겠지. 방향이 같을 뿐이야. 괜히 오해하지 말자.’ 그렇게 스스로를 진정시켰지만 한편으로는 뒤에서 따라오다 덮치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골목길을 빠져나와 2차로가 보였고 이 길로 5분만 걸어가면 우리 집이었다.
쭉 걸어야 했지만 계속 따라오고 있는 남자가 찝찝했다. 자연스럽게 도로를 건너 반대편으로 갔다.
다행히 따라서 건너지는 않았다. 결국 내 착각이었네 오해를 해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찰나에 들었다.
하지만 도로 건너편을 힐끔 쳐다보는 순간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그놈이 건너편에서 걷는 속도를 맞추고 나를 계속 쳐다보며 걷기 시작했다.
‘너 지금 쫄았지? 네가 아무리 괜찮은 척해봤자 소용없어. 넌 독 안에 든 쥐야.’ 그렇게 비아냥거리며 실실 쪼개는 것 같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머릿속으로는 티브이에서 봤던 성범죄들이 후루룩 지나갔다.
중학교 2학년 때 과학 선생님이 했던 성교육도 떠올랐다. 섹스에 응해주는 척하며 잠자코 있다가 남자의 그것을 피가 나도록 물어뜯으라는 그 말이 왜 그때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리고 핸드폰으로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놈이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집 앞으로 빨리 나와달라고 이상한 사람이 따라온다며 속삭였다. 아빠는 전화를 끊지 말고 계속 통화하자며 나를 안심시키셨다. 곁눈질로 쳐다보니 통화소리를 들었는지 계속 기회를 보고 있는 건지 따라오기만 했다.
그날따라 우리 집은 참 멀게도 느껴졌다. 분명히 10분 거리였는데 1시간은 더 걷는 느낌,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핸드폰을 귀에 댄 채 50미터 앞에 러닝셔츠와 팬티 바람으로 집 앞에 서있는 아빠가 보였다. 마지막 힘을 내서 집까지 뛰어갔다. 꼴찌를 도맡아 하는 실력이었는데 살면서 가장 빨리 달렸다.
집에 들어와 긴장이 풀려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아빠랑 엄마가 진정하라며 다독이고 그놈의 얼굴을 봐야겠다고 같이 대문 밖으로 나가셨다. 역시 착각이 아니었다. 술에 취해 헤롱거리며 대문 밖에 쭈그리고 앉아서 “아이 씨발, 아깝다.”라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더란다. 아빠는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남자를 쫓아냈지만 진짜로 신고를 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보복할 수 있다며 그냥 넘어가자고 했다.
그때는 일 크게 만들어 봤자 나만 손해야 라는 생각에 한 밤의 해프닝처럼 넘어갔지만 그 xx가 다른 사람에게 범죄를 저질렀으면 어떡하지 라는 후회를 지금도 하고 있다. 만약 그때로 돌아가 무슨 일이 벌어질 뻔한다면 지금의 나는 들고 있던 헌법 책으로(벽돌보다 무겁다. 맞으면 뇌진탕이 될 수도) 그놈의 머리통을 후려 칠 것이다.
그날부터 부모님은 옷차림을 단속시키고 귀가 시간을 앞당기셨다. 도대체 내가 잘못한 게 뭐지? 더워서 옷을 시원하게 입었을 뿐이고 학점을 메꾸기 위해 열공을 했을 뿐인데! 술에 취해 이성의 끈을 놓은 채 나를 겁주던 그 사람의 잘못만 있을 뿐이다. '술에 취해 기억이 안 나요..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저 사람이 먼저 꼬셨어요.'라는 돼도 안 한 소리들로 비겁해지지 말자. 술은 면죄부가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