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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별곡 Nov 22. 2023

상상 연애 아니가?

"아들아, 올해 빼빼로데이에도 아무것도 못 받아오는 거가? 불쌍한 놈. 어떻게 여자 친구 한 명 없냐? 쯧쯧."

"나 여자친구 있었거든."


아빠의 놀림에 발끈한 아이가 믿기지 않는 말을 내뱉는다. 밥을 먹다가 콩나물 무침이 콧구멍으로 들어가는 줄 알았다.

"네가 여자친구가 있었다고? 언제? 주말마다 집에 있었는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고?"

엄마의 눈초리가 앙칼지니 아차 싶은 녀석이 눈치를 살피며 웅얼웅얼 거린다.

"3월에 사귀었는데 지금은 헤어졌어. 이제는 없어."

"뭐라고? 물을 때마다 없다더니 왜 거짓말했어? 폰도 안 하고 주말에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으면서 언제 만나서 같이 놀았는데?"

흥분을 가라앉히고 담담한 마음으로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마치 형사가 범인을 취조하 듯 아이에게 숨 쉴 틈을 주지 않았다. 나는 쿨한 엄마다, 데이트하라고 영화표도 끊어주고 용돈도 듬뿍 줄 수 있는 그런 엄마다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 미국 드라마에 나오는 그런 우아한 엄마는 아무래도 될 수 없을 것 같다.


"엄마가 사귄다고 하면 이렇게 화낼까 봐 말 못 했다고. 여자친구는 대학 가서 사귀라며?"

"그거는 그때 농담처럼 한 말이고 실제로 사귀면 말을 했어야지. 깜찍하게 한마디도 안 하나? 엄마가 진짜 놀랄 노자다. 얼마나 사귀었는데?" 즐겁지도 않은데 미소를 짓고 다정한 목소리로 아이를 달랜다.

"4~5개월 사귀었어."

"또 또 정확하게 말 안 하네. 왜 헤어졌는데?"

"그냥 재미없어서 헤어졌어."

"재미가 없었다고? 그게 무슨 말이지? 그럼 누가 먼저 사귀자고 했어?"

아이의 연애사를 샅샅이 알고야 말겠다는 엄마의 심문은 멈출 줄 모른다.

"5학년 때 같은 반인데 내가 먼저 사귀자고 했어."

"걔가 아니고 니가 왜? 왜 사귀자고 했는데? 걔 이름이 뭐고?"

"최 00. 얼굴이 예뻐서." 이제 헤어졌으니 숨길 게 없다고 생각한 아이는 자포자기가 되어 순순히 대답한다.

"예쁘다고? 어디 얼굴 보자. 같이 찍은 사진 있지?"

"없어. 헤어지고 다 지웠어."


두 모자의 대화가 재미있는지 옆에서 실실거리며 가만히 지켜보던 남편은 사진이 없다고 하니 불쑥 대화에 끼어든다.

"니 아빠가 놀려서 거짓말하는 거쟤? 상상 연애 아니가? 사귀었다는 증거가 어째 하나도 없노?"

"아니야!!! 진짜로 사귀었거든." 아이가 또 발끈하며 얼굴과 귀가 시뻘게진다.

"그럼 같이 찍은 네 컷 사진도 없나? 니 저번에 엄마가 같이 찍자고 하니까 여자친구랑 처음 찍을 건데 내가 엄마랑 왜?? 그랬잖아."

"네 컷 사진 없어. 안 찍었어." 사진을 못 찍은 게 후회가 되는지 금세 표정이 시무룩해진다.

"됐다. 그만 물어라. 이제 안 사귄다는데 초딩들이 사귀는 게 심각한 일도 아니고."

남편은 그만 하라며 핀잔을 준다. 하지만 유치원 다닐 때 같은 반 여자아이를 4년이나 짝사랑했었던 아이를 옆에서 지켜보며 속이 터졌던 나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폭주 기관차이다. 멈출 수가 없다. 하원할 때 데리러 갔다가 그 여자애 옆에서 공주 가방을 들어주고 드레스 지퍼를 올려주던 녀석의 모습이 어제처럼 생생하다. 여자애는 새침한데 드레스 입은 그녀를 황홀하게 쳐다보던 녀석의 표정에 기가막혔다. 아들이 공주의 시중을 드는 하인인 줄 알았다.


"그럼 마지막으로 딱 하나만 물어볼게. 엄마가 진짜 이해가 안 가서 그런다. 주말에도 한 번을 집에서 안 나가고 핸드폰도 꺼놓은 상태로 있으면서 도대체 언제 만났는데? 진짜 아빠 말대로 상상 연애가?"

"아침에 등교할 때... 걔가 더 웨스턴 살아서 만나서 같이 갔어."

"??!!!!!!!!!!!!!!!!!!!!!!!!!!!!!!!!!!!!!!!!!!!!!!!!!."

이제야 아침마다 전쟁이었던 상황들이 이해가 됐다. 7시에 칼 같이 일어나서 샤워를 한 후 머리 드라이를 하고 입을 옷이 없다고 옷장을 난장판으로 만든 게 다 이런 이유였다. 8시 30분까지 등교인데 7시 40분만 되면 늦었다고 허겁지겁 나가는 아이에게 도대체 왜 이렇게 일찍 가냐고 짜증을 냈다. 일찍 가서 책도 읽고 공부도 한다는 아이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하도 옷이랑 머리에 신경을 쓰길래 그림도 잘 그리고 미적 감각이 있으니 단순히 패션에 관심이 많은 거라고 넘겨짚었다. 나의 순진함에 실소가 나왔다.


불현듯 친하지도 않은 동네 아줌마가 '아들 연애하는 거 아니에요?'라고 물었던 일이 떠올랐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며 맨날 집에만 있고 폰은 하지도 않는데 여자친구 있으면 그럴 리가 없죠!라고 정색을 하던 내가 얼마나 웃겼을까? '그래요~?'라고 되물으며 씩 코웃음 치던 표정도 떠올랐다. 나도 모르는 우리 아들의 연애사를 그 아줌마는 다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여자친구 안 사귀는 것보다는 사귀는 게 정상이지, 그게 훨씬 나은거지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해도 열 뼘 이상 멀어진 것 같은 녀석에게 서운함이 밀려온다. 내 아들이 아닌 옆집 아이를 보는 기분이다. 전 여자 친구의 얼굴에 대한 궁금증도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아이의 폰을 빼앗아 카톡을 뒤지며 최 00을 찾아본다. 차단까지는 안 했는지 그 아이의 프로필이 나온다.


뉴진스 혜린이가 이상형이고 예뻐서 사귀었다길래 인형같이 생긴 얼굴을 상상했다. 엥? 그런데 이 다크 한 분위기는 뭐지?  밝고 화사한 느낌이 전혀 없네? 질투에 눈이 먼 엄마는 그 아이의 단점만 보인다.

"잘 헤어졌네. 어디가 예쁘노? 우리 아들이 백배 천배 만배 아깝다. 아들~헤어져서 마음 많이 아팠지?"

"아니 전혀~."

진짜인지 센 척을 하는 건지 이제는 아이의 눈빛을 봐도 모르겠다. 조금 진정이 된 나는 이제야 쿨한 엄마 행세를 한다.

"이제부터는 사귀면 사귄다고 엄마한테 꼭 말해야 돼. 절~대로 화 안 낼게. 엄마가 데이트하라고 용돈도 줄게. 그러니까 비밀연애 해서 엄마 뒤통수치지 말고 알았지?"

가짜 미소를 날리며 아이를 회유한다. 나의 꼼수를 눈치챘는지 대답이 없는 녀석은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남편은 작작하라고 입을 틀어막지만 내 눈길은 아이의 뒤통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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