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방별곡 Dec 06. 2023

알약을 삼키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는 태어난 지 100일도 되지 않을 때부터 병원에 다녔다.

첫 번째로 병원에 갔던 일이 십여 년이나 지났음에도 눈앞에 생생하다. 남편은 중국으로 3개월 간 출장을 떠나야 했고 나는 아이와 함께 친정에서 엄마가 해준 밥을 먹으며 편하게 보낼 나날로 신나 있었다.


아이가 아이를 키운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모든 것이 미숙해서 나의 엄마를 보모처럼 부려먹었다. 그녀는 아이가 조리원에서 나온 날부터 하던 일을 그만두고 우리 집에 상주하며 큰 딸의 산후 몸조리를 해주었다. 그런 엄마에게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고 용돈도 드리지 않은 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해주는 밥을 삼시 세끼 꼬박꼬박 받아먹었다. 밤새 젖을 찾으며 보챘던 아이를 맡겨 놓고 낮에는 모자란 잠을 보충하거나 휴대폰을 했다. 청소, 빨래, 장보기, 아이와 놀아주기 등등 모든 일을 손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그런 나태함으로 벌을 받은 걸까? 남편이 출장 가 있는 3개월간 시댁에 와서 지내라는 시어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정말 가기 싫었지만 지금 가지 않으면 영원히 시어머니와 척을 진다는 남편의 말에 겁이 나서 2개의 트렁크에 아이 짐을 가득 넣어 출장 가기 하루 전날 시댁에 왔다. 만날 때마다 어색한 시부모님과 시아주버님이 있는 집에 유일한 편인 신랑도 없이 백일을 지내야 된다는 상황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게다가 잘 먹고 잘 자서 순하다고 생각했던 아이가 그날부터 밤에 잠을 자지 않고 한 시간에 한 번씩 깨었다. 처음에는 환경이 바뀌어 낯설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오래된 시댁의 집은 어디선가 찬바람이 들어와 아이의 코끝을 시리게 했고 코에 콧물이 가득 차서 숨 쉬는 것을 힘들어했다. 데리고 나간 적도 없고 집안에만 있었는데 그렇게 됐다.


결국 이곳에 온 지 딱 30일 만에 근처 소아과에 가게 됐다. 머리가 희끗희끗하며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쓴 70대쯤 되어 보이는 의사 선생님은 무슨 백일도 안 된 아기의 코에 이렇게 콧물이 가득 차있냐며 온도, 습도 관리 제대로 안 하냐고 초보엄마를 나무랐다. 울컥한 마음에 선생님께 우리 집이 아니에요!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주택인데 외풍이 심해서요 라는 말만 남긴 채 항생제, 콧물약, 코막힘약, 기침약을 받아왔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먹은 거라고는 엄마의 모유밖에 없었던 아이의 몸에 화학물질이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 저 그냥 00랑 집에 갈게요 라는 말을 입안에서 오물거리다 목구멍으로 삼켰다.


맘카페에서 '아기에게 약 잘 먹이는 법'을 검색해 선배 엄마들의 노하우를 공부했다. 내 주먹보다 작은 아이의 볼을 꽉 움켜쥔 채 입을 벌려 빨간색 시럽에 탄 가루들을 삼키게 했다. 먹기 싫다고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울었지만 항생제는 중단하면 내성이 생긴다는 말에 독한 엄마가 되어서 끝까지 다 먹였다. 그러고 나서는 다시 울보 엄마가 되어서 우는 아이를 껴안고 시댁 거실에 혼자 앉아 흐느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아이의 비염이 내 책임인 것 같다. 시댁에 가지 말고 그냥 우리 집에 있어야 했다는 후회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또다시 밀려온다. 여름 빼고는 대부분을 병원에 가서 비염약을 타온다. 하도 아기 때부터 약을 먹어서 그런지 거부감 없이 잘 받아먹었는데 문제는 올해부터였다. 키도 나만해지고 몸무게도 50킬로에 가까워지니 병원에서 이제부터는 알약을 먹어야 된다고 했다.


나도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알약을 먹었던지라 겁먹은 아이에게 대수롭지 않게 밥 먹듯이 꿀꺽 삼키라 고했다. 알약이 목구멍에 걸려서 숨이 안 쉬어질까 봐 무섭다고 했지만 바보같이 쓸데없는 걱정을 하냐며 물을 잔뜩 먹고 삼키라고 윽박을 질렀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시도를 하던 아이는 혀가 약을 자꾸 붙잡는다며 한 알도 못 삼킨 채 전부 토해버렸다. 내년이면 중학생인데 어떻게 약도 하나 못 삼키는지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옆에 있던 남편은 평소 같았으면 나보다 더 화를 내고 소리쳤을 텐데 이 상황을 이해한다는 듯이 차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정 삼키지 못하겠으면 알약을 씹어먹으라고 했다.


"뭔 소리고? 어떻게 저 쓴 약을 씹어 먹는데? 무슨 약으로 고문하나?" 

"절대 약이 안 넘어간다. 나는 정로환 30알도 다 씹어먹었다."

그럼 그렇지.. 이제 봤더니 알약 못 삼키는 것도 유전이었다. 나는 약을 갈아서 달라는 아이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유튜브에 '알약 잘 삼키는 법'을 검색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못 먹는 사람들이 많았고 다양한 방법들이 꽤 있었다. '약을 입에 넣고 물을 숙여서 마시면 약이 저절로 넘어가요, 캡슐형은 약이 물에 뜨기 때문에 목구멍 가까이 약을 놔두고 빨대로 물을 마시면 쉽게 넘어가요, 약을 넣고 물을 마신 후 목을 가볍게 뒤로 젖히세요.' 등등.

이 방법들을 전부 시도했지만 약은 넘어가지 않았고 아이의 혀 위에서 흐물흐물 녹기 시작했다. 역겨운 맛에 고통스러워하는 아이가 짠하면서도 바보 같았다. 결국 원두 그라인더에 약을 넣고 간 후 주스에 타서 마시게 했다.


이렇게 영영 알약을 못 삼키면 어떡하지? 군대 가서 아플 때 알약 못 먹는다고 선임들에게 맞는 거 아냐? 불안해진 나는 계속 네이버와 유튜브를 검색했고 마침내 방법을 찾았다. 영상 속 남자는 약사분이었는데 아이들은 처음부터 물과 삼킬 수 없으니 음식과 함께 먹으라고 했다. 예를 들어 과자를 입안에 넣고 씹다가 삼키기 직전 알약을 넣으면 쉽게 넘어간다고 했다. 영상 속 약사님이 먹었던 똑같은 알새우칩을 사 와 아이에게  시도했다. 물을 1.5리터 이상 먹어야 알약 한 알을 겨우 삼켰는데 이 방법으로 하니 쉽게 쉽게 넘어갔다.


아이는 이제부터 자신 있게 알약을 삼킬 수 있다며 내 목을 끌어안고 헤벌쭉 웃음을 지었다. 바닥을 뚫고 지하 100층까지 내려갔던 자신감을 회복한 듯 보였다. 

“어른으로 한 계단 더 올라간 거 정말 축하해.” 아이를 안은 채 등을 토닥여주었다.

이전 03화 상상 연애 아니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