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해외여행은 중학교 시절의 풋풋함이 남아있는 고등학교 1학년 여름 방학 때다. 여고생 30명과 선생님 두 명 이렇게 단체로 일본으로 간 것이었다. 당시 자매결연을 맺은 일본의 여학교와 교류를 위해 장장 12시간이 걸리는 배를 타고 떠났는데 멀미약을 먹었음에도 파도에 요동치는 울렁거림에 속이 뒤집어져서 뻗어있던 기억만 나는 게 못내 아쉽다.
그리고 두 번째 해외여행은 또다시 20여 년이 흘러 시댁 식구들과 같이 간 베트남 여행이었다.
대학교에 입학 후 친구와 함께 인도로 봉사활동 겸 배낭여행을 가고 싶었지만 그 나라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던 어른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중도포기를 했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해외여행을 가게 될 날이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11명의 대식구가 3박 5일간의 짧은 일정을 패키지로 간다는 것은 제대로 된 여행이 아니었고 별 감흥 없는 관광지에 얼굴 도장만 찍으며 시댁 식구들의 눈치만 봤었기에 제대로 힐링하며 즐기지를 못했었다. 순식간에 지나간 두 번째 여행에서 또다시 5년이 흘렀고 일주일 뒤 벼르고 벼르던 세 번째 여행을 떠나게 된다. 일을 하면서 쥐똥만큼 모아놓은 돈을 다 털어서 가는 여행이다. 일 년 전에 일을 시작할 때는 스위스-이탈리아 유럽 여행을 하고 말겠다는 큰 꿈이 있었지만 생활비와 학원비로 이리저리 빠져나가는 돈은 세 명이 가기에는 턱 없이 부족했다. 나 혼자 갈까 생각도 했지만 아이가 마음에 걸렸다. 중학생 되면 방학 때도 일정이 빡빡할 텐데 세 명이 다 함께 가는 여행은 왠지 이게 마지막일 것 같았다. 게다가 14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며 생고생할 게 뻔하다고 유럽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던 남편은 돈을 보탤 마음이 없어 보였다.
결국 나는 여고생 시절 이후로 가보지 못했던 첫 해외여행지,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엔화가 800원대로 떨어진 것도 한 몫했다. 중학생이 되는 아이에게 감동적인 졸업 여행을 선물하고 싶고 해리포터 덕후이기도 한 나를 위해 오사카로 목적지를 정했다. 먹방과 쇼핑, 유니버셜 스튜디오까지 트리플이라는 어플을 이용해 빡빡한 계획을 세우고 일본 여행자들에게 필수라는 네이버 카페 <네일동>도 가입했다. 일주일 내내 여행 유튜버들의 브이로그를 봤더니 벌써 10번 넘게 다녀온 기분이다. 한국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오사카가 아닌 서울 명동에 온 것 같다는 댓글들이 보이지만 한 달 전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호텔을 결제했을 때부터 떠날 생각을 하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도파민이 마구마구 분출된다.
홈쇼핑에서 보고 바로 질러버린 새로 산 캐리어들도 거실에 진열해 놓고 달력의 날짜를 지워나갔다. 그런데 해결하지 못한 숙제가 하나 남겨져있다. 바로 아직도 시댁에 여행 간다는 말을 드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마지막 해외여행을 시댁과 함께 했었고 그 경비를 시어머니께서 일체 지불하셨다. 그 이후로도 계속 여행을 가자고 어머니께서 말하셨지만 성사되지 않고 있었는데 우리끼리만 간다고 하기가 영 껄끄러웠다. 남편에게 대신 말하라고 했지만 어이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3박 4일인데 안 해도 된다. 갔다 온 줄도 모른다."
"말 안 하고 갔다가 들켜서 욕 들어 먹으면 어떡하는데?"
"또 또 일어나지도 않은 일 쓸데없이 걱정한다. 니 그거 병이다. 여행 가는 게 죄도 아닌데 왜 욕먹는데?"
"그러니까 말하고 가자고. 괜히 말 안 하고 갔다가 나중에라도 들키면 모든 화살이 나에게 돌아온다. 팔은 안으로 굽는 거 모르나? 나만 욕먹는다."
"그럼 네가 말해라. 나는 말하기 싫으니."
"..."
결국은 또 나의 몫이다. 여행 경비도 내가 지출해, 모든 여행 계획도 내가 세워, 이런 불편한 상황까지 떠넘기니 남편이 아니라 큰 아들을 키우는 게 분명하다. 답답한 마음에 지인들에게 물어보니 말하고 가라는 파와 안 해도 된다는 파로 나뉘었다. 말을 하고 가면 면세점 선물도 신경 써야 하니 굳이 뭐 하러 이야기를 하냐는 건데 맞는 말이지만 찜찜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내가 말하는 것으로 결심을 하고 이틀 전 시댁에 김장 김치를 가지러 갔다. 어머니가 퇴근해서 돌아오시면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가기 직전에 말씀을 드려야지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그날따라 집에 온 시어머니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인사를 했는데 받는 둥 마는 둥이었고 말에서 특유의 까칠함이 느껴졌다. 일주일 전에 안부 전화를 안 한다고 어머니께 니는 손가락이 부러졌냐는 욕을 들어서 더 얼어붙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은 틀리지 않았다. 이번에도 역시나 쫄보, 늑대 앞에 놓인 양이 돼버렸다. 매서운 눈초리의 얼굴을 보고 말할 수가 없었다. 가시처럼 목에 걸려 여행에 ㅇ자도 나오지 않았다.
결혼한 지 십 년이 넘었는데도, 이제 아이가 중학생이 되는데도 처음 시집와서 바짝 얼어 있는 새색시 모습 그대로라니 한숨만 나온다. 친정 엄마에게 물어보니 그런 말도 못 하냐며 속이 터지겠단다. 내가 바보 천치를 낳았다고 한탄을 하신다. 괜히 물어봤다. 끝끝내 한마디도 못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편과 아이에게 신신당부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