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력(應力)이라는 이름으로의 회복
금속 막대를 양쪽에서 잡아당기면, 막대 내부에서 힘이 생긴다. 늘어나지 않으려는, 찢어지지 않으려는 힘. 물리학에서는 이걸 '스트레스(stress)'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스트레스'라는 단어의 첫 시작은 '버티는 힘'이었던 것이다. 그런 다음 의학용어로 사용되었다. 외부에서 힘이 가해질 때, 재료 내부에서 그에 '대응하여' 발생하는 힘이라는 뜻으로서. 이 개념을 정확히 담은 단어가 있다. 응력(應力). '응할 응(應)', '힘 력(力)'. 외부의 힘에 응답하는 내부의 힘. 그런데 우리는 '스트레스'라는 단어를 원래의 의미대로 사용하지 않고 있다.
"나 스트레스받았어."
이 문장의 생김새를 보라. 나는 받는 사람이다. 누군가 주고, 나는 받는다. 상사가, 회사가, 세상이 던지면 나는 맞는다. 이 문장은 나를 피해자로 고정시킨다.
하지만 '응력'의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힘은 외부에서 온 게 아니다. 외부의 압력에 맞서서 내 안에서 생성된 것이다. 무거운 짐을 들어 올릴 때를 생각해 보자. 팔이 떨리고, 어깨가 뻣뻣해지고, 온몸이 긴장된다. 이 느낌은 짐의 무게인가, 아니면 그 무게를 버티려는 내 근육의 힘인가? 당연히 후자다. 짐 자체는 아무 느낌이 없다. 내가 느끼는 건 저항하는 내 몸의 감각이다.
스트레스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가 '스트레스'라고 부르는 그 조여 오는 느낌, 목이 뻣뻣해지는 감각, 가슴이 답답해지는 순간, 이건 외부의 압력 그 자체가 아니다. 그 압력에 맞서 내 안에서 일어나는 긴장이다. 만약 내가 아무 저항 없이 무너져버린다면, 스트레스도 없다. 그냥 끝이다. 스트레스가 느껴진다는 건, 내 안에서 무언가가 아직 버티고 있다는 뜻이다. 찢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뜻이다. 그 불편함은 패배의 신호가 아니다. 전투 중이라는 신호다.
물리학에는 '탄성 한계'라는 개념이 있다. 재료에 힘을 가했을 때, 이 한계 안에서는 힘이 사라지면 원래 상태로 돌아온다. 고무줄을 당겼다 놓으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처럼. 하지만 탄성 한계를 넘어서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영구 변형이 일어난다. 힘을 빼도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더 심하면 아예 부러져버린다.
우리 삶에도 이처럼 탄성 한계가 있다. 이 한계 안에서의 압박은 힘들지만 회복 가능하다. 바쁜 한 주를 보내도 주말이면 리셋된다. 야근이 계속돼도 휴가 후에는 괜찮아진다. 하지만 한계를 넘어선 압박은 쉬어도 돌아오지 않는다. 월요일 아침이 두렵다. 일요일 저녁부터 가슴이 답답하다. 좋아하던 것들이 더 이상 좋지 않다. 이건 영구 변형의 신호다.
더 가면 파단이 온다. 번아웃. 퇴사. 관계 단절. 몸이 먼저 멈춰버리는 순간.
스트레스 '관리'라는 말을 우리는 많이 쓴다. 그런데 대부분의 관리법은 외부 압력을 줄이는 데만 집중한다. 어쩌면 정말 중요한 스트레스 관리법은 '내 안의 저항력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아는 것'이 아닐까. 나는 지금 탄성 한계 안에 있는가, 이미 넘어섰는가. 버티는 힘이 탄력적으로 작동하고 있는가, 균열이 가기 시작했는가. 이 압박이 나를 단련시키고 있는가, 마모시키고 있는가. 이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는 사람은, 부러지기 전에 멈출 수 있다.
니체는 말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하지만 여기에 조건이 하나 붙어야 한다. 그것을 '당한 것'이 아니라 '버틴 것'으로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시련을 겪어도, 어떤 사람은 피해자로 남고 어떤 사람은 생존자가 된다. 차이는 무엇을 겪었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이름 붙이느냐에 있다.
"스트레스받았어."
이 말 대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지금 버티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