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상사는 밉기 마련이다
나는 오랫동안 이 감정이 단순한 '미움'이라고 생각했다. 내 상사는 인성이 개차반이고, 나쁜 사람이고, 나는 피해자고, 그래서 그가 나를 미워하는 거라고. 최근에야 그게 절반의 진실이라는 걸 알았다. 나머지 절반은, 쓰고 나면 스스로 한심해 보일 것 같아서, 내 자존심이 끝까지 버티고 있었다. 그래도 한번 써보려 한다. 솔직히 말해보자면, 나는 그 사람을 미워하면서도 그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다. 내 자존감을 갉아먹고, 내 판단을 의심하게 만들고, 나를 작아지게 만드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회의 중에 내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면 안도하고, 무시하면 무너진다. 합리적이지 않다. 그 사람의 평가가 대체 뭐라고. 한동안 나는 이걸 직장 내 권력 구조 탓으로 돌렸다. 상사니까. 평가권이 있으니까.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것만은 아니었다.
분노를 거슬러 올라가면 실망이 있고, 실망을 거슬러 올라가면 기대가 있다. 기대가 없었다면 실망도 없었을 것이고, 실망이 없었다면 이 지독한 분노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분노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계속 실망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이번에는 나를 인정해 줄 거라고 기대한 것은 아니었을까. 진짜 상관없는 사람을 미워할 수 있을까. 나를 평가할 자격이 없다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 뭐라 하든 화가 날까. 아니다. 무시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나는 무시하지 못했다. 나는 그 사람에게 나를 평가할 권한을 줬다. 상대에게 이 권한을 준 사람만이 미워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더 미워하기로 했다.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창피해서, 그 욕구를 미움으로 덮으려 했다. "어쩌라고, 내가 널 더 미워해." 이게 내 복수라고 생각했다. 밤에 잠들기 전 상사가 내게 했던 말을 곱씹었다. 머릿속으로 완벽한 반박을 준비했다. 상상 속에서 수십 번의 논쟁을 벌이고, 수십 번을 이겼다. 그 사람의 위선을 폭로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 사람이 해고되는 장면을 상상했다. 미워하고 미워하고 또 미워했다. 그게 나의 저항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가끔 이런다.
니체는 이것을 '리센티망:원한(ressentiment)'이라고 불렀다. 원한에 사로잡힌 사람은 노예가 된다. 왜냐하면 그의 모든 사고가 그 대상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미움은 상대에게 거대한 중요성을 부여한다. 미워한다는 건 그 사람이 내 감정에 영향을 미칠 자격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내 정신의 상당 부분을 그 사람이 점령하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더 미워해주겠어'라는 다짐조차 함정이다. 그 문장에는 이미 그 사람이 들어가 있다. 나는 '그 사람을' 더 미워하겠다고 말하는 것이니까. 미움은 관계를 끊는 게 아니라 관계를 유지하는 방식이다. 미워할수록 멀어지는 게 아니라, 더 단단히 묶인다.
그렇다면 대안은 뭘까. 미워하지 말고,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면 될까? 아니다. 애초에 내 성격상 그런 게 가능했으면 이런 고민을 하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게다가, 내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아닌데' 싶은 언행을 하는 상사를 상대로 '용서' 같은 소리는 하고 싶지 않다. 용서는 내가 할 일이 아니다. 그건 그 사람이 뉘우쳤을 때나 의미 있는 것이고, 대부분의 괴롭히는 상사는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른다. 용서를 운운하는 건 다시 한번 피해자에게 숙제를 떠넘기는 것이다.
미움에는 상대가 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분노에는 기대가 섞여 있다. 하지만 '무관심'에는 기대가 없다. 무관심은 상대를 감정적 대상에서 아예 제외시키는 행위다. 더 이상 그 사람에게 화를 낼 이유도, 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이유도 없다. 그냥 그 사람은 내 세계에서 의미 있는 존재가 아니게 된다.
이것은 자의에 의한, 능동적인 판단이다. 나는 이 사람을 평가했고, 평가 결과 이 사람은 내 감정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저 사람은 나의 미움조차 받을 자격이 없다."
이 문장이 진심으로 가능해지는 순간, 무언가가 풀릴 것이다. 핵심은 '권위의 박탈'이다. 서두에 말한 것처럼, 나는 무의식 중에 그 상사를 나를 평가할 권한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무관심은 그 권한을 회수하는 것이다. "당신은 나를 평가할 자격이 없다." 이 말은, "나는 당신에게 인정받을 필요가 없다"보다 강하다. 상대에게 내 내면에서의 직위를 박탈하는 것이다. 내 머릿속에서 그 사람을 해고하는 것이다.
물론 한 번에 되진 않을 것이다. 충분히 미워해야 한다. 충분히 집착의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왜 내가 그 사람에게 매여 있었는지, 그 사람의 인정이 왜 그렇게 중요했는지, 그 미움 뒤에 숨은 욕구가 무엇이었는지 직면해야 한다. 그 과정을 건너뛰면 경멸이 아니라 억압이 된다. 억압된 미움은 반드시 돌아온다.
나는 지금 그 과정 어딘가에 있다. 어떤 날은 무관심에 가깝고, 어떤 날은 다시 미움에 빠진다. 그 사람이 회의에서 나를 무시하면 여전히 하루 종일 그 장면을 곱씹는다. 아직 멀었구나 싶다가도, 예전보다는 나아졌다는 걸 안다. 무관심은 냉정해 보이지만, 실은 나를 위한 전략이다. 그 사람에게 쏟던 에너지를 회수해서 나에게 쓸 수 있게 해 주니까. 미움에 쓰던 정신적 자원을 내 삶에 쓸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최악의 상사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벌은 무관심이 아니다. 경멸이다. 경멸은 그 사람이 내 인생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사람에게 주는 벌인 동시에 나에게 주는 자유다. 나는 그 자유를 향해 가고 있다. 아직 도착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방향은 안다. 그리고 같은 길 위에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글이 조금이라도 지도가 되었으면 한다. 완성된 지도가 아니라, 함께 그려가는 지도이다.
물론 이 모든 건 감정의 영역이다. 현실에서는 여전히 그 사람 밑에서 일해야 할 수도 있고, 웃으며 인사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면에서 그 사람을 해고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같은 미소를 짓더라도 다르다. 전자는 연기고, 후자는 굴복이다. 나는 연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니, 연기조차 필요 없이 진짜로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 부디 당신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