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옥의 <무진기행>
광주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쯤 지나, 마침내 어느 산모퉁이 길을 돌아가면 거기 <무진 Mujin 10Km>
이정비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실제로 '무진霧津', 곧 ‘안개가 많은 나루터’라는 지명은 김승옥의 단편소설 <무진기행>에 나오는
가상의 지명이다. 하지만 그 소설 속에서 말하는 ‘무진’이라는 ‘유난히 안개가 많은 마을’은 분명 남도, 어딘가에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리고 나는 언제서부터 그곳이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는 없지만 꼭 한 번은 찾아가 보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어렵사리 날을 잡아 광주에서 이른 아침 버스를 타고 갈 요량으로 전날 미리 늦은 밤 열차를 타고 내려왔다. 터미널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아 잠깐 눈을 붙이고 아침 일찍 터미널로 나갔다.
둥근 원 모양을 이룬
현대식 터미널은 시설이 잘 되어 있었고, 특히 1층에 대형 서점이 자리하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어디를 나설 때 미리 든든하게 하는 터라 그날도 터미널 한 곳에 잘 마련된 음식점을 찾아갔다.
나는 밥을 좋아하니 ‘해물찌개백반’으로 주문했다. 주인장은 부족하면 얼마든지 밥은 더 드리겠다며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마침 찌개도 입에 잘 맞았고, 특히 ‘어리굴젓’의 감칠맛에 밥을 추가하였다.
그런데 정작, 어디로 가겠다는 정확한 목적지를 아직 정하지 못했다. 티켓을 판매하는 창구 위, 벽면 게시판에 행선지, 그리고 시간, 요금이 실시간으로 계속 바뀌고 있었다.
코스는 일단 바닷가 해안 쪽이고 최소한 한 시간 이상 멀리 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강진, 해남, 함평, 순천 등, 그 가운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행선지를 결정했다.
물론 그곳이 아닐 수 있다. 나는 다만 버스에 올라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되어 그러한 분위기를 찾아 느끼면 될 일이었다.
급하게 서두를 일도 없고, 충분히 돌아볼 수 있는 그런 느긋함이 필요했다. 지금은 당시보다 차편이나 도로가 좋아져서 그 옛날처럼 털털거리는 비포장 자갈밭 길을 먼지를 뽀얗게 일으키거나 산 고갯길로 구불구불 가지도 않을 터였다. 아니 어쩌면 그런 맛이 있어야 제대로 느끼겠지만 그거야 시대가 바뀌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무래도 어제 잠을 설친 터라 그저 잠깐씩 눈을 붙이기도 하면서 지나는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시가지를 벗어나자 대개가 그러하듯 들판을 가로질러 강줄기이든 작은 개울이든 물길을 자주 건너고, 더구나 때가 오월인지라 들판이며, 산이며, 길가의 가로수, 우거진 숲에도 모두가 물이 올라 마냥 싱그러운 초록빛이었다.
특히 남도에는 푸르른 보리밭이 자주 눈에 띄었다. 그것도 유난히 논에 심은 보리밭이 많았다. 논에다 심어서 그런지 가지런하지 않고 움푹움푹해 보였다.
이곳 남쪽의 들판은 드넓은 평야 지대가 아니라서 그저 바둑판처럼 반듯하지 않았고 산, 들, 언덕, 개울이 연이어지는 모습에 전혀 질리지 않고 그저 마음 편안함으로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작품 속에서 ‘햇볕의 신선한 밝음과 살갗에 탄력을 주는 정도의 저온, 그리고 해풍에 섞여 있는 정도의 소금기, 이 세 가지를 적당하게 합성하여 수면제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약보다 상쾌하고, 수면 효과가 아주 뛰어나서 편안하게 조용히 잠들 수 있는 수면제가 될 것’이라는 소설 속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나 역시 그렇게 개발된 약을 복용해 본 것은 아니지만 저절로 졸음이 왔다. 어쩌다 차창 밖을 내다보니 날씨는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 차분히 가라앉고 있었다. 그렇게 졸다 깨다, 한 시간여 지나가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 종점 터미널에 도착했다는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버스에서 내리면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참,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뿌옇게 내려앉은 안개가 밤에 바다로부터 밀려들어 온다는 그 해무海霧는 물론 아니었지만, 고맙게도 뿌연 비안개가 내려와 영락없이 딱 그러한 분위기를 연출해 주었다.
이미 이곳 지명이 어디인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글에 표현되기를 마치 점령군처럼 밀려와 있다는
<무진기행>의 그 안개와는 분명 차이가 있겠지만 정말 내가 기대했던 그 분위기를 그곳 날씨가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 한 날씨에 희뿌연 비안개로 뒤덮인 바닷가는 내가 상상하고 바라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어쩌다 어렵게 날을 잡아 이곳까지 내려와 그저 햇볕이 쨍쨍 내리쪼이는 바닷가를 맞았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리고 거기, ‘언젠가 여름밤, 멀고 가까운 논에서 들려오는 개구리울음소리를, 마치 수많은 비단조개껍질을 한꺼번에 맞비빌 때 나는 듯한 소리를 듣고 있을 때, 나는 그 개구리울음소리들이 나의 감각 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수없이 많은 별들로 바뀌어 있는 것을 느끼곤 했었다. 청각의 이미지가 시각의 이미지로 바뀌는 이상한 현상이 나의 감각 속에서 일어나곤 했었던 것이다.’
개구리울음소리가 조개껍질 부딪치는 소리로, 다시 밤하늘에 수없이 반짝이는 별들로 바뀌어 간단다.
작가 ‘김승옥’은 그의 말대로 '청각'의 이미지에서 그대로 '시각'의 이미지로 바뀌어 간다고 했다.
얼마나 순간적이고 놀라운 반전이며 아름다운 상상력인가. 나는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러한 작가적 능력은 천부적으로 타고나는 것일까.
'절차탁마切磋琢磨', 그저 갈고닦는다고 해서 거기에 이를 수가 있을까.
그러나 나는 결코 ‘조바심’내지는
않기로 했다. 오늘은 그저 짙은 비 안개가 밀려오는 그 안갯속에 파묻혀 세상 모든 것을 떨쳐 잊어버리고
오직 그곳에서 <무진기행> 주인공이 되어 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