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바가지 이야기

<동화>

by 청목



1.

만물상회 옆, 공터에 자리 잡은 할머니 앞에는 박 바가지들이

여러 개 놓였습니다.

"얘, 저것 좀 봐!'

가게 안에 놓여 있던 *뿔 바가지가 말했습니다.

"어디 뭘?"

"저기 우리 가게 앞을 보란 말이야."

"아니, 저것도 바가지니?"

"정말, 누가 아니겠니? 저게 박 바가지라는 거야. 옛날에는 저걸 바가지로

사용했지만 지금은 누가 써야 말이지. 사겠다고 물어보는 사람도 없잖니?"

"그러게 말이야. 저 생긴 것 좀 봐, 투박하게 생긴 것이 꼭 시골 촌뜨기 같다."

"거기다 우리처럼 색깔이나 곱니, 얼굴은 누래 가지고."

뿔 바가지들이 재미있다는 듯 조잘댔습니다.


2.

주황색 뿔 바가지들만 자꾸 팔려 나갑니다.

박 바가지들은 아침나절 그대로 놓여 있습니다.

해도 기울고, 파장이 가까워지면서 오가는 사람도 뜸해졌습니다.

박 바가지들은 얼른 새 주인을 만나 할머니가 어둡기 전에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할머니 이마에는 주름만 깊어졌습니다.

박 바가지들은 얼른 새 주인을 만나 할머니가 어둡기 전에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3.

지난봄입니다.

어린 박 순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땅 위로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의 정성스러운 보살핌 속에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4.

여름이 되자 박 넝쿨은 울타리를 타고 올라갔습니다.

그러더니 어느새 쑥쑥 자라 지붕 위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달빛이 환하게 비치는 밤, 달빛보다 하얀 박꽃을 피웠습니다.


5.

그 하얀 박꽃 밑에 아기 엄지만 한 박이 열렸습니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연두색 여린 박이 하나, 둘, 셋 박들은 그렇게

형제자매 같이 자랐습니다.


6.

박이 아기 머리만큼 자라자 할아버지는 제각기 이름도 붙여주었습니다.

점이 있다고 점박이, 얼굴이 갸름하다고 예쁜이, 마치 아들딸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리고 자리를 잡아 반듯하게 자라도록 똬리도 만들어 고여

주었습니다.


7.

가을이 깊어갑니다.

쪽빛 하늘에 햇별이 따갑습니다.

고추밭에는 빨간 고추잡자리가 이리저리 멤을 돕니다.

지붕 위 둥그런 박은 하얀 달빛 속에 찬이슬을 맞으며 단단하게

여물어 갑니다.

할아버지가 사다리를 밟고 지붕 위로 올랐습니다. 그리고 하

나, 둘 박을 따서 아기라도 안은 듯이 조심조심 내려옵니다.



8.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그 옛날 흥부네 내외처럼 마주 앉아

슬근슬근 박을 탔습니다.

할머니는 박을 삶아 겉껍질을 벗겨 내고, 박속나물도 하고,

바람이 잘 통하는 그늘 속에 매달아 말렸습니다.



9.

처음 옥빛이던 박은 차차 황금색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제야 어엿한 박 바가지가 된 것입니다.

아주 작은놈은 생긴 모양대로 이름도 종구라기로 간장 뜰 때 쓰고,

크지도 작지도 않은 중간 것은 물바가지로 항시 할머니 곁에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주 큼지막한 녀석은 마른 바가지로

곡식을 담는 데 사용했습니다.



10.

그 가운데 오늘 장마당에 나온 박 바가지들은 아침나절만 해도

공연히 우쭐댔습니다. 할머니 머리 위에 얹혀 산골 집을 나설 때는

집에 남은 바가지들 앞에서 잘난 척 어깨를 으쓱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꼴입니까? 종일토록 한 개도 팔리지 않고,

뿔 바가지들한테 창피만 당하고.....

박 바가지들은 잔뜩 주눅이 들고, 할머니는 한숨만 푹푹--

바로 그때입니다.

한 중년 부인이 다가왔습니다.

"할머니, 이 바가지 파시는 거예요?"

"아! 예, 팔구 말고요."

"모두 제가 사고 싶은 데 얼마나 드리면 되겠어요?'

"모두라고요?"

할머니는 깜짝 놀라며 다시 물었습니다

"예, 모두요."

"그저 주시는 대로만 받을 게요.

할머니는 욕심 없이 말했습니다

"그래도 얼마라고 말씀을 하셔야지......!"

할머니는 손님의 말에 눈만 껌벅일 뿐 선뜻 대꾸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내려놓은 박 바가지의 값은 너무 많았습니다.

할머니는 이렇게 많은 돈은 다 받을 수 없다고 극구 사양했습니다

"할머니, 이렇게 예쁜 바가지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정성을 기울였겠어요?"

오히려 부인은 박 바가지를 한 아름 안고 돌아가며 횡재라도 한 듯 싱글벙글

즐거웠습니다

그 부인은 바로 박 공예가였습니다.


11.

공방에 돌아온 부인은 바가지 얼굴에 밑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조각칼로 그림을 새기기 시작했습니다.

박 바가지는 아픔을 못 이겨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자기를 애써

길러 준 할머니, 할아버지 곁을 떠나 이런 아픔까지 겪게 되는 게

서글프기도 했습니다.

할머니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집에 남은 형제들이 부럽기도 했습니다.

잠시 공예가의 일손이 멈추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곧이어

끝이 뾰족한 송곳날이 꼭지 부분을 뚫고 들어왔습니다.

박 바가지는 그만 너무 아프고 지친 나머지 정신을 놓고 말았습니다.


12.

박 바가지가 시내의 작은 전시실에 나와 걸린 것은 그해 겨울 어느

날이었습니다.


창밖에는 함박눈이 내렸습니다.

"아니, 박이 어쩜 이렇게 예쁠 수가....!!"

"세상에, 우리 고향마을 하고 똑같은 걸?"

"맞아, 달밤에 초가지붕 위 저 하얀 박꽃 좀 봐!"

"뒷마루에 나앉아 달구경 하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는 어떻고?"


사람들이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박 바가지는 모처럼 행복했습니다.*





1) 뿔 바가지 : (뿔) 플라스틱으로 만든 주황색 바가지


<시와 동화> 2025. 봄호

*한국방송대 문학상(이오덕선생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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