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이건희 컬렉션’ 관람을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을 가게 되었다.
전철을 이용 이촌역에서 지하통로를 따라 가다 보면 그대로 연결되었다. 길 양쪽으로 이어진 대숲 길을
지나 건너편에는 솔숲으로 둘러싸인 ‘거울 못 호수’가 있고 가장자리에 멋진 정자(亭子)가 보인다.
곧이어 광장에서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면 우선 ‘경천 사지 10층 석탑’의 우뚝 선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석탑을 중심으로 고전과 현대가 한데 잘 어우러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래 경복궁 옆에 자리하고 있던 <국립중앙박물관>을 이곳에 옮겨 이와 같이 건립되기까지
처음 이전 계획을 세우고, 치밀한 설계를 거치는 등, 수많은 전문가들의 역량과 땀방울이 결집되어
이루어진 결과일 것이다.
이번에 특별히 전시되고 있는 <이건희 컬렉션>이외도 기존의 국립박물관 본래 소장품과 뜻있는
사람들의 훌륭한 기증품들이 공간을 달리하여 전시되고 있었다.
거기에는 ‘신라 반가 사유상’ 등, 국보급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국내관이 있었고, 또 다른 공간에서
외국의 역사 깊은 문화유산들이 함께 기획 전시되고 있었다.
이제 관람이 약속된 시간에 맞추어 <이건희 컬렉션> 관람실에 들어갔다. 전시실 입구에는
‘어느 수집가의 초대’라는 문구로 관람객을 맞고 있었다.
전시 품목은 총 1,4백여 점에 이르며, 그 수량에서뿐만 아니라 작품에 따라서는 실제 국보급 수준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아름답고 수려한 고려청자, 보름달이 떠있는 듯한 조선 시대의 하얀 달
항아리, 진귀한 서적, 서화, 조각품, 국내 유명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고, 거기다 외국 화가의
작품도 눈에 띄었는데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 등이 함께 전시되고 있었다.
그곳에 전시된 작품의 가치에 대해서 전문가라도 쉽게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그 작품이 갖고 있는
고유의 작품성에 대한 평가를 올바로 해야 할 것이다.
전시 작품 가운데 나의 관심과 유난히 눈길을 끈 것은 바로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의 작품이었다.
이분들의 작품은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을 것이라 여긴다.
우선 이중섭 화가의 작품 가운데 너무나 잘 알려진 <황소> 작품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본래 우리나라 소(牛), 한우는 아주 순한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전시된 <황소> 작품은 몹시 화가
나있는 모습이다. 이중섭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어쩌면 당시 화가
이중섭 본인의 모습, 가슴속에 있는 어떤 울분이 느껴지는 자화상을 그렇게 표현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어쩌다 제주도 서귀포에 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꼭 찾아가는 곳이 바로 <이중섭 기념관>이다.
내가 그곳을 찾는 이유는 이중섭의 작품을 감상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아내 이남덕(山本方子)과의
안타까운 사랑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가족이 전쟁을 피해 이곳 서귀포에 내려와 비록 작은 단칸방에서의 생활이었지만 어찌 보면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이들이 유일하게 한데 모여 생활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그때가 그와 가족에게 있어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가족들을 주제로 한 다양한 작품
활동을 활발하게 할 수 있었던 곳이기도 했다.
6.25 전쟁은 누구에게나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오직 그림 그리는 재주밖에
없었던 화가 이중섭으로서는 너무나도 어려웠던 시기였다고 한다.
결국 생활고를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고, 그렇게 사랑했던 아내 이남덕과 아이들을 모두
처가인 일본으로 떠나보내야 했다.
결국 홀로 남게 된 이중섭은 부두 노동자의 일을 하는 등, 곤궁한 생활을 하다가 정부의 환도로 서울에
올라와 친구들의 도움으로 미도파 화랑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전시회 작품 가운데는 가족과 아이들의 벌거벗은 모습의 작품들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 당국의 몰이해로
그 작품들을 모두 ‘춘화(春畫)’라고 규정하고 강제 철거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사건은 화가 이중섭에게 너무나 큰 정신적 충격을 안겨주었고, 결국 자학과 실의에 빠지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1956년 극심한 우울증으로 인한 정신적 피폐와 영양실조로 그만 아직 젊은 나이 39세에 천재적인
화가 이중섭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지금에 이르러 이곳 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는 이중섭 작품은 아주 작은 소품이라 할지라도 그 가격이 얼마라고 가늠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그 당시 따뜻한 국밥 한 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고 길에 쓰러졌던 화가 이중섭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아마도 그렇게 된 것은 전쟁의 와중에 생활고로 인한 어려움이 한 가지 이유는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당시의 사회가 화가로서의 그의 자존감(自存感)을 지켜주기보다 오히려 무참히 짓밟음으로써 그가 끝내 버텨내지 못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