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영어 과외 교사의 예상 밖의 등장
몇 번 택시를 타고 다니다 보니 이제 레지던스 주변은 눈에 제법 익었다. 8차선 정도의 큰 도로에서 우측으로 빠져나와 굴다리 쪽으로 좌회전하면 우리 동네가 바로 나타난다. 그런데 굴다리 밑에서 90도 꺾이는 순간 도로변에 작은 과일가게 하나가 눈에 띄었다. 허름하기는 해도 형형색색의 열대과일들이 단정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주변은 외국인 관광객이 편하게 접근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얇은 베니어판을 모자이크처럼 붙여서 만든 듯한 주변의 낡은 건물은 모두 잿빛이었고 오가는 행인들과 함께 무척 복잡해 보였다.
마침 사다 놓은 과일이 모두 떨어졌다. 무거운 과일 때문에 다시 SM 몰을 찾아갈 생각을 하니 피곤함이 밀려왔다. 결국 그 과일가게를 찾아가기로 했다. 택시로 가기에는 애매하게 가까운 거리라 트라이시클을 타기로 했다. 이번 마닐라에서 처음으로 시도해보는 트라이시클, 현지인들이 즐겨 이용하는 교통수단이지만 정해진 요금표나 미터기가 없어서 실제로 관광객들이 이용하기에는 택시보다 되려 불편하다.
트라이시클은 지방 소도시에서는 가장 일반적인 교통수단으로 택시보다 더 많이 보이기도 한다.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휴양지 보라카이(Boracay)를 가기 위에서는 공항이 있는 칼리보(Kalibo)라는 소도시를 거쳐가야 한다. 그 작은 도시는 관광객을 사로잡을만한 매력이 없어서 거의 모든 관광객은 공항에서 지상 낙원 보라카이로 바로 연계되는 교통편을 미리 예약하고 가능한 한 빨리 그곳을 벗어난다. 수년 전 나와 남편 그리고 아이는 보라카이를 찾았고 그때 가는 길에 1박, 오는 길에 1박씩 칼리보에 머물며 조금은 느긋하게 움직였다. 칼리보의 이름 없는 수수한 호텔에서 나와 버스터미널로 이동하려는데 거리에 택시가 보이지 않았다. 오직 트라이시클만이 한적한 도로를 오가고 있었다. 별다른 수가 없었기에 트라이시클에 모든 여행 짐을 싣고 세 사람이 어정쩡 올라탔는데 그 과정이 생각보다 즐거웠다. 특히 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던 아이는 발아래로 도로가 훤히 보이는 상황에서 큰 소음과 함께 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것이 놀이기구를 탄 것처럼 즐거웠던 모양이었다. 깔깔깔 웃으며 손과 다리를 흔들어대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8시를 갓 넘긴 일요일 아침, 마침 날이 맑다.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아이에게 귓속말로 잠시 시장에 다녀올 테니 자고 있으라고 일러두고 길을 나섰다. 가서 보니 그 과일가게가 있는 곳은 재래시장의 입구였다. 호기심에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주말 아침 장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옮겨 온 것처럼 도로변에서는 보이지 않던 활기찬 장면들이 눈 앞에 펼쳐졌다. 밤새 내린 비로 젖은 흙바닥에는 물 웅덩이가 많았다. 이리저리 피해 걸음을 내딛으며 주변을 살폈다. 작은 채소가게 옆에는 돼지족이 줄줄이 매달린 정육점이 있었고, 조금 더 지나니 쌀가게가 보였다. 사람만큼이나 많은 파리가 채소가게와 정육점 주변에 몰려 있었다.
다시 돌아 나오는 길에 바나나 가게에서 가장 예뻐 보이는 송이를 신중하게 골라 값을 치렀다. 그리고 오늘의 목적지였던 과일가게에서 망고와 수박을 사서 돌아왔다. 정신없이 진동하며 흔들리는 트라이시클에서 수박이 굴러 떨어지면 어쩌나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이렇게 애써서 사온 바나나와 망고는 정말 형용할 수 없이 달고 맛있었다. (수박은 싱겁고 퍼석한 것이 별로 맛이 없었다)
일요일 영어 과외수업은 두 시간만 하기로 했다. 오후 1시에 시작한 수업이 3시에 끝났다. 그 사이 집주인으로부터 갑자기 연락이 왔다. 그레이스 레지던스 거주자들이 가입된 온라인 커뮤니티에 과외 교사 구인 글을 올렸는데, 관심 있어하는 사람이 마침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면접을 볼 수 있느냐고 묻기에 일단 시간을 오후 4시로 정하고 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4시 15분쯤이었나 현관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는데 남자와 여자 둘이 서있었다. 어리둥절한 나를 보고 여자는 옆의 남자를 가리키며 남편이라고 소개했다. 혹시 몰라 함께 왔는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동석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정장 차림을 한 선한 인상의 부부였기에 흔쾌히 둘을 집 안으로 들였다. 그렇게 갑자기 마련된 면접을 가장한 대화가 무려 한 시간 반 가량 이어졌다. 그만큼 시간이 흘렀는지도 몰랐다. 아이도 그 자리에 함께 앉아 우리의 대화를 듣다가 선생님들과 아주 간단한 대화를 나누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바로 내일부터 수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아내가 2시간 그리고 남편이 2시간, 이렇게 하루 4시간의 영어 수업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진키에게 정성 들여 메일을 썼다. 과외를 그만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하고 여전히 진키에 대한 좋은 감정과 응원의 마음이 있다고 전했다. 결국 상황이 이렇게 되어서 정말 미안하다고 적었는데, 무엇보다도 진키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메일을 확인한 진키에게서 결국 답장은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