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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정 Aug 15. 2019

15일: 숙제

숙제를 다한 아이처럼 뿌듯하게

빨래

에어비앤비에서 이곳 그레이스 레지던스를 검색할 때 대체로 세탁기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문제의 16층 숙소도 그렇고 새로 옮긴 15층의 '우리 집'도 세탁기가 없다. 상가건물 안에 있는 빨래방(laundry shop)을 이용하면 된다는 설명을 두 차례나 들었다. 일단 열흘 정도 돌려 입을 수 있는 정도의 여벌을 챙겼다. 여름옷들이라 넉넉하게 여벌을 챙겨도 짐은 큰 차이가 없었다. 30일 체류 동안 빨래방은 두 번 정도만 이용할 계획이었다. 마침내 그날이 왔다. 갈아입을 옷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수업 중인 집시와 아이에게 양해를 구하고 빨래방으로 향했다. 목요일 오전 10시를 갓 넘긴 시간, 아마도 붐비지는 않을 것이다. 두 시간 수업이 끝나기 전에 빨래를 다 하고 돌아갈 수 있을 테지.


미리 위치를 파악해두었던 빨래방에 다다르자 놀라운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빨래방 안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접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상가 문밖까지 늘어서있었다. 순간 포기를 하고 돌아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당장 내일부터 입을 옷이 없었기에 길게 늘어선 줄 맨 끝에 가서 섰다. 생각보다 줄은 빨리 줄어들었다. 내 순서가 오자 빨래방 직원은 나에게 원하는 빨래 코스(빨래 시간과 헹굼 횟수에 따라 요금이 모두 다르게 책정되었다)를 선택하게 하고 세탁세제도 추가 구매할 것인지 기계적으로 빠르게 물었다. 나는 여섯 번째로 세탁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아마도 30분 이상 기다려야 할 것 같다는 직원의 말을 듣고, 그 사이 같은 상가에 있는 은행에서 비상금을 환전하기로 했다.


환전을 하고 돌아오니 여전히 내 차례는 오지 않았다. 십여분 후 직원이 내 이름을 불렀고 4번 세탁기를 이용하라고 했다. 능숙해 보이는 주민에게 세제 투입구의 위치를 물어보며 빨래를 집어넣고 시작 버튼을 눌렀다. 2016년 남동생이 하버드대학에서 박사 후 과정 중에 있을 때 겸사겸사 보스턴에 놀러 간 적이 있는데, 그때 이용한 빨래방은 직접 동전을 집어넣어 원하는 만큼 세탁기와 건조기를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여기는 미리 지불한 요금에 따라 카운터에서 각 세탁기를 원격으로 조정해주고 이용자는 시작 버튼만 누르면 되는 방식이었다. 세탁 1회에 헹굼 2회 코스와 25분의 건조기 사용까지 해서 190페소(약 4400원)를 지불하였다. 모두 다해서 60분 정도가 걸릴 예정이었다.


그레이스 레지던스의 빨래방 "SUPER WASHER"


4번 세탁기 앞에 앉아서 세탁물이 뱅글뱅글 돌아가는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가끔 집에서도 세탁기나 건조기 앞에 앉아서 빨래가 돌아가는 모습을 쳐다보고는 하는데, 이유는 모르지만 그렇게 넋을 놓고 있으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데 나의 4번 세탁기와 그 양 옆으로 나란히 놓인 세탁기의 모습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다른 세탁기는 드럼 세탁 중인데도 솜사탕 기계처럼 하얀 거품으로 가득 차있었다. 이상한 생각에 그때부터 사람들이 세탁하는 모습을 살펴봤는데 세탁 중에도 몇 차례 걸쳐 세제를 계속 집어넣고 있었다. 풍성한 거품이 날 때까지 그 행동은 계속되었는데, 정말이지 세제를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이 사용했다. 그리고 그 빨래는 마지막 헹굼까지 계속 거품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곳이 더운 나라다 보니 쉽게 땀이 나고 냄새가 날 수 있으니 좋은 향이 나는 세제를 많이 사용하게 된 것인가. 이제야 우리에게 제공된 침대 시트와 얇은 이불, 그리고 수건에서 코를 찌르는 듯한 강한 세제 냄새가 나는 이유를 알게 된 것 같다.


세탁을 마치고 다시 왼편에 마련된 건조기 구역으로 빨래를 옮겨야 했다. 그 앞에는 빨래를 마치고 건조를 기다리는 바구니들이 일렬로 늘어서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저히 수업시간을  맞춰 돌아갈 수 없겠다. 평일의 빨래방이 이렇게나 붐비다니. 필리핀 마닐라에서 전망 좋은 사업 아이템 하나를 발굴한 느낌이었다. 20분 후 젖은 빨래를 건조기에 던지듯이 집어넣고 핸드폰의 타이머를 25분으로 맞추었다. 알람이 울리기 전까지 아이를 데리고 다시 돌아와야 한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 수업을 마친 아이를 데리고 다시 빨래방으로 왔다. 건조기에서 막 나온 따뜻하고 보송보송한 빨래를 차곡차곡 개켜놓고 있자니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이게 뭐라고... 미루고 미루던 숙제를 마치고 난 아이처럼 후련하면서도 뿌듯한 마음이었다.


건조가 끝난 빨래를 개켜 정리할 수 있는 넓은 스테인리스 작업대


마침내 태국 식당

빨래방에서 나와 아이를 끌고 벼르고 별렀던 태국 국숫집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식당 입구에서 아이는 걸음을 멈추고 내 손을 잡아끌며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다. 이번만큼은 단호하게 하기로 했다. "오늘은 엄마 먹고 싶은 거 먹을 거야." 아마도 오전 시간 전부를 빨래방에서 보낸 것에 대한, 전형적인 가사 노동에 대한 나름의 보상이 필요했던 것 같다. "우리 사이좋게 한 번씩 하자. 오늘은 엄마 먹고 싶은 거, 다음에는 네가 먹고 싶은 거로 정하자." 아담한 식당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주문했다. 아이를 위한 새우 볶음밥과 나를 위한 믹스 타이 누들(Mix Thai Noodle) 그리고 태국식 밀크티를 주문했다. 믹스 타이 누들은 소고기, 피쉬볼, 미트볼 등 그 식당의 모든 국수 고명을 다 모아놓은 국수였다.


국수도 볶음밥도 모두 성공적이었다. 특히 아이는 내 국수에 고명으로 올라간 (양지로 추정되는) 소고기를 맛있게 건져 먹었다. 나와 식성이 다른 듯 닮아서 아이는 빵보다는 국수를 좋아하고 칼칼하고 매운맛을 선호한다. 그래서 소고기를 태국식 고추기름에 찍어 정말 맛깔스럽게 먹었다. 이때다 싶어서 또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처음에는 낯설어서 거부감이 들었지만, 막상 먹어보니 맛있지? 앞으로는 경험해보지도 않은 일을 미리 겁부터 먹고 안 한다고 하지 말고, 조금만 용기를 내면 이렇게 맛있는 음식도 많이 찾아낼 수 있는 거야, 알았지?" 아이는 듣는 둥 마는 둥 결대로 찢긴 부드러운 소고기를 연신 고추기름에 찍어 입에 집어넣느라 바쁘다. 그 모습마저도 너무 예쁘다. (나는 전형적인 고슴도치 엄마가 맞다.)


믹스 타이 누들(Mix Thai Noodle)
타이식 새우 볶음밥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

빨래방에서 대기시간이 길어지자 중간에 은행에 들러 비상금을 환전하기로 했다. 이번 30일간의 마닐라 여행은 갑자기 결정된 것이었고 그래서 미리 준비한 예산이 없던 상황이었다. 다른 집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가족도 매달 계획적인 지출 항목에 따라 1년 살림이 빡빡하게 돌아간다. 그래서 1년 살림에 최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 방향으로 이번 여행 지출 계획을 세웠다. 항공권과 숙소는 신용카드로 결제하여 다음 달로 분산시키고, 현지에서 사용할 비용을 잘 계산해서 200만 원선에서 해결해보기로 했다. 환전을 하고 나니 미화 1,700달러가 되었고, 집에 400달러가 있었던 것을 합하니 모두 2,100달러였다. 이 정도면 그런대로 괜찮을 것 같았다. 만일의 일을 대비하여 해외 ATM에서 바로 현지화폐 출금이 가능한 EXK카드를 우리은행에서 발급받아 두었다.


30일 후에 필리핀 페소가 많이 남아도 문제이기 때문에 공항에서 일단 미화 1,500달러만 환전해두었다. 그런데 오늘 작은 시누와 조카가 마닐라로 3박 4일 일정으로 여행을 왔다. 내일 시누가 머물고 있는 호텔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이 일정은 예산 산정에 없던 것이라 추가로 100달러를 환전해두기로 했다. 레지던스 단지 내에는 비교적 규모가 큰 BDO 은행이 있다. 인터넷으로 미리 찾아보니 은행에서 환전을 하려면 여권 외에도 출신 국가의 신분증이 함께 필요하다고 했다. 마침 주민등록증을 가져왔고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레이스 레지던스 안의 BDO 은행


친절한 미소의 직원은 내 여권과 주민등록증 그리고 100달러 지폐를 받아 들고 하나하나 확인하던 중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주민등록증에 영문이 없기 때문에 환전을 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은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 주민등록증에는 영어가 없다. 대신 한국에서 발급받아 온 영문 주민등록등본이 있으니 서류상의 내 한글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그리고 영문 이름을 여권과 함께 교차 확인하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렇게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었는데도 갑자기 지점장까지 나타나서 창구 여직원과 둘이 머리를 맞대고 심각한 표정으로 한참 얘기를 나누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미화 100달러를 은행에서 환전하는 게 이렇게나 까다로운 과정이 필요한 일이었던가.


지점장은 내 모든 신분증을 들고 어디론가 갔다. 그리고는 잠시 후에 이번만 특별히 환전을 해주겠다고 말하면서 원래는 환전을 해줄 수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해주었다. 내가 BDO 은행 계좌가 있었다면 여권만 있어도 문제가 없지만 다음부터 은행에서 환전을 하려면 영문으로 된 한국 신분증과 여권 2가지를 모두 제출해야만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한국 여행자들은 사설 환전소를 이용할 수밖에 없겠군요."라고 물었더니 직원은 여전히 친절한 웃음을 지으며  "그렇다"라고 답해주었다.


그때부터 어마어마한 양의 서류를 작성했다. 한국에서 통장 개설을 하거나 대출신청서를 작성하는 수준으로 많은 빈칸을 채워야만 했다. 출생지, 생년월일, 직업, 현주소 등을 포함한 한국의 모든 정보, 그리고 현재 마닐라 체류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하나하나 적어나갔다. 중간에 글씨가 틀려 다시 고쳐 쓴 몇 곳에는 내 서명을 모두 적도록 했다. 중요한 계약서 작성 방식 그대로였다. 그리고 직원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내가 건넨 미화 100달러의 출처가 어딘지 물었다. 그리고 환전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함께 물었다. 갑자기 장르가 수사물로 바뀌는 듯했으나 정신을 차리고 "한국의 은행에서 환전해온 돈이에요. 그리고 여행 비용으로 쓰려고 해요."라고 답했다. 그러나 내가 불평을 할 입장이 아니었다. 단돈 100달러를 환전하는 업무 때문에 내 앞의 불운한 직원은 수많은 서류를 계속 작성하고 있었다. 결코 과장이 아니라 10분이 넘도록 우리는 여러 장의 서류를 주고받으며 복잡한 절차를 거쳐나갔다. 그리고 내가 건넨 100달러 신권 지폐는 마치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중요한 단서인 것처럼 서류와 함께 클립으로 따로 묶어서 서랍 속에 조심히 보관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5,195페소를 건네받을 수 있었다.


결심했다. 앞으로는 꼭 사설 환전소를 이용하겠노라고.


마지막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던 친절한 은행 직원 (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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