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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니아 Mar 27. 2024

밟아도 밟아도 천백도로

중년의 테피스트리

작년 늦가을 가족들과 제주 여행을 갔다. 우리 집 강아지와 함께하는 제주도는 처음이었다. 이상기후로 11월 초임에도 늦더위가 이어졌고, 오랜 가뭄으로  제주도에서 가을정취를 찾기가 힘들었다. 숙소는 제일 좋아하는 구좌 비자림 숲 근방으로 정하고, 애견 동반 가능한 관광지와 식당으로 코스를 짜다 보니 동선이 비효율적으로 커졌다.

2박 3일 중  둘째 날, 그날은 낮에 비 예보가 있었다. 생각보다 비구름이 더디 남하해서인지 다행히도 해질 때까지 비가 안 왔다. 원래는 성산 쪽에 저녁 먹을 곳을 찜해 두었건만  굳이 갈치를 먹어야 한다는 남편 고집에 애견동반 가능한 갈치집이 있는 중문(숙소는 조천)에서 식사를 했다. 어느 때처럼 아들과 남편은 반주를 했고, 운전은 내 차지가 됐다. 숙소까지 1시간 30분, 이미 어둑해진지가 오랜지라 네비와 표지판만 보고 따라갔다.


그런데 출발하자마자 비가 내렸고, 오르막길로 가는 느낌이었다. 아뿔싸! 낮이었으면 이 길을 피했을 것이다. 이 길은 작년에 엄마와  여행하던 중 멋모르고 들어섰다가 식겁했던 곳이다. 그때 심식사도 미루고 빠른 경로라는 것만 보고 들어섰다가 국립공원의 끝없는 산길을 1시간 30분 정도를 달려, 겨우 휴양림 휴게소에서 무릎도가니를 부여잡고(하도 브레이크를 밟아서) 컵라면을 먹었던 기억이 났다. 다시는 이 길을 절대 오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차를 돌리고 싶은 마음뿐이었지만 반대편으로는 드문드문 차들이  내려와서 도무지  돌릴 수 없는 상황에서 게임은 시작됐다.


 빗길에  앞차의 불빛도 뒤차의 쌍라이트도 없는 칠흑같이 어두운 지금 상황에 비하면, 지난번은  드라이브 정도였다는 걸 알게 됐다. 천백고지가 적힌 표지판이 보이자. 등골이 오싹했다. 다시는 이 길을 절대 오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그래서 이번여행에서는 운전할 때 항상 네비와 T 맵을 동시에 가동하고 확인했건만, 밥 먹고 긴장의 끈을 놓았던 탓에 우리 차는 빠져나올 구멍이 없이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산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안개가 깔려 한 치 앞도 차선도 제대로 안 보였다. 비만 오는 건 호사였다. 

1100도로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고 양손으로 핸들을 기도하듯이 붙들어 매고 엉금엉금 기었더니 속도제한 30을 채우기도 벅찼다. 옆의 신랑과 아들도 한동안 겁을 먹었는지 조용하더니, 행여 조금만 액셀을 밟을라 치면 “속도 줄여, 천천히”를 외쳤다. 아무짝에 도움도 안 되는 그 소리에 욕이 나올 뻔했지만, 욕에 쓸 에너지를 아껴두길 잘했다. 바로 다음 퀘스트는 우박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에 폭격을 맞는 듯, 아까의 안개는 호사였다고 산신령이 비웃으며 죽비로 어깨를  후갈기는 느낌이었다.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남편은 ‘속도’를 아까보다 더 외쳐대고 이제는 무서운 것보다 화가 나서 저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진땀을 흘리고 달리다 보니 어느 순간 우박이 그치니 안개와 빗길이 예사로워졌다.


어느덧 내 뒤의 차도 나타나서 라이트 불빛이 한없이 따뜻했다. 하지만 그 차는 답답한지 이내 추월해 가버렸다. 이제 내리막으로 내려왔다고 안심을 하기엔 일렀다.  비자림 숲길은 밤에 되니  낮의 면모가 사라지고,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노려보는 같았다.  나만 모노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조명된 것같이 밖에 서있는 느낌으로 함께 있어도 외로운 채 2시간 달려 숙소에 도착했다. 사실 그때 제일 절실한 건 유머였다.


 그날 밤 어깨 승모근이 귀 밑에 까지 닿았다, 오싹한 기분에 주뼛 선 머리끝은 진정되지 않았고, 신경세포들은 천백 도로의 밤길을 자꾸 복기해 댔다. 새벽이 깊어질수록 세포가 날을 가는 듯, 곤두서서 한잠도 못 잤다. 반면에 우리 강아지는 떡실신이 돼서  3일 동안 잠만 잤다. 내 기분을 온전히 교감한 건 너뿐이었어.


사실 안개에서 우박으로 넘어갔을 때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마치 내 결혼생활 같아서. 결혼 초 술 좋아하는 남편 때문에 속 끓이고 앞날이 막막했다. 하지만 우리 부부 문제는 결혼생활에서 중대사가 아닌 게 돼버렸다. 곧 시조부모님을 우리가 책임져야 했고, 얼마 후 시할머니와 시어머니가 동시에 수술하고 병원에 계셨을 때 내 몸과 정신도 나가 자빠질 뻔했던 때가 떠올랐다. 20년이 휘몰아치듯 지나가고 나서야 평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천백고지가 지나온 내 삶을 VR로 체험시켜 준 것만 같았다.      


 5년 전 신랑이랑 결혼 20주년으로 갔던 스페인 여행에서도 내 결혼생활의 데칼코마니를 찍고 왔다. 첫날 숙소에 짐 풀고 미리 서치 해 둔 저녁 먹을 식당을 찾아 헤매다가 신랑이 오물테러를 당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동양인 혐오 테러구나, 하필 스페인 땅을 밟은 지 1시간도 안되었는데...... 옷을 닦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들어간 식당은 중국인이 하는 한식집인데 하필 맛이 없었고 불결했다. 신랑은 집에 가고 싶다고 했다. 마치 내가 신혼 초에 헤어지자고 것처럼, 난 신랑이 어른스럽지 않아서, 그리고 20년간 참고 살아온 내 인내심을 여기에서도 시험하게끔 만들어서 화가 났다. 그때 시차 때문이었을 속에 있는 말을 뱉어 버렸다. ‘정말 고소하다’라고, 그 후로 냉전이 흘렀고, 밥을 반도 안 먹고 나와버렸다. 한국에서처럼 싸우고 생 까기가 스페인까지 이어졌다. 


낯선 이역만리 땅에 둘이 머리를 모아도 부족한 마당에 타인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내가 앞서갔고, 신랑은 보일락 말락 20미터 정도를 유지하며 따라왔다. 뒤에 신랑은 허상 같이 느껴졌다. 

외롭고 수심이 가득한 채 카탈루냐 광장을 걸었다. 숙소까지 길도 찾아야 하고, 주변인도 경계해야 했다. 소매치기 천국인 이 거리에, 나 말고 타인들은 다 소매치기이자, 동양인을 우습게 보는 예비 테러리스트처럼 느껴지니 무섭고,  한없이 움츠러들었다. 영원히 등이 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구글 지도를 몰레 흘끗 보며 겨우 숙소로 들어와서 한숨을 돌렸지만, 앞날이 막막했다. 오늘일이 앞으로의 여행의 서막을 열어주는 복선 같아서 더 큰 한숨이 나오고 골이 찌릿찌릿했다. 더 이상 남은 일정이 그려지지 않았다. 내가 왜 이 사람이랑 여기에 왔을까?/마치 내가 왜 이런 사람이랑 결혼했을까를 수없이 후회한 20년 전의 데자뷔가 같았다. 아니다 20년 전이 지금의 데자뷔였을 수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난 이런 불편한 상황이 익숙했기에. 다음날 바르셀로나의 아침공기로 무거운 마음을 날려 버리기에 충분히 새로웠고 설레었다. 하지만 여전히 시차 적응은 되지 않았고, 마음의 소리를 필터 없이 주고받다 보니 어느 순간 내성이 생긴 건지 거슬리지가 않았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창밖 풍경이 너무 황홀해서였을 수도 있다. 세비야의 야경과 분위기에 녹아들면서 조금씩 여행이 할만해졌고, 긴장의 끈을 내려놓는 대신, 남편의 팔짱을 놓지 않았다. 어느새 자연스럽게 화해가 됐고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일정 끝에 다시 돌아온 바르셀로나는 다른 도시 같았다. 츤데레처럼 처음에는 홀대하다가, 서서히 이방인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따뜻한 주인장의 모습이었다. 이 여행, 내 결혼 같았다. 초반에 힘들다고 내쳤으면 지금의 이 시간은 없었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안을  하며 결혼 20주년스러운 여행이 되고 말았다.  

어쩜 제주 천백도로를 넘을 때 이성의 끈을 사수할 수 있었던 건, 결혼의 짬에서 나온 내공이었을 수 있다. 그간의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나를 바닥에서 끄집어내 주었을 수도. 나의 결혼생활도, 바르셀로나의 첫날밤도, 제주도의 천백 도로도 힘든 일들이 초반에 몰아치는 비슷한 패턴이다. 퀘스트를 깨야지만 중반에서 후반으로 넘어갈 수 있고, 숨통이 트이는 운명인가 보다. 포르테에서 시작해 나중에서야 안단테로 도달할 수 있는 삶이 무례하지만 미워할 수가 없다. 초반에 액땜한 셈 치는 걸로, 나도 모르게 어느새 마음과 몸의 멧집이 늘었나 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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