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의 힘이 무엇인지 궁금한 당신에게
미술치료사라는 직업을 갖는데 있어서 꼭 박사학위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학위라는 것을 받으려면 어느 학문이나 마찬가지 이듯이 연구와 논문이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결과물을 만드려면 장시간의 학업, 자신의 전공에 대한 깊이 있는 공부가 당연히 필요하겠지요...
여기 저의 논문의 일부분을 올립니다.
흔히 논문이라 하면 실험을 하여 어떤 효과를 도출해 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질적연구라는 방법론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시는분은 아시겠지만.....
내담자에서 상담자가 된 어느 여성의 전환적 상담경험에 관한 의미연구
삶의 여정 중간에,
어두운 숲속에서 길을 잃은 내가 보였다.
- 단테, 『신곡: 연옥편』 중에서
미국 융(Jung)학파 정신분석가인 제임스 홀리스(James Hollis)는 그의 저서『The Middle Passage(중간항로)』에서 15년간 분석가로서 만난 내담자들의 반복적 패턴에서 마흔이라는 나이, 즉 그들이 중간항로를 통과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우리 인간은 삶의 변화와 원래의 자기감을 어떻게 습득하는지와 어떻게 재정립 하는가 등의 주제를 심리학적으로 기술하였다. 서점에서 그의 책을 발견했을 때 나는, 번역된 제목에서 눈을 뗄 수 없었고, 곧바로 구입을 하게 되었다. 그 책의 한국어제목은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 이다.
내 인생에서 마흔으로 접어드는 시기는 그 전과는 사뭇 다른 형태였는데, 10년간 몸담았던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을 겪으며 우울증과 싸우던 시기였다. 그 시기는 상담소를 다니면서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된 나의 고통스러운 내면을 달래느라 육아를 위해서 직장을 그만두었지만 정작 육아에는 집중하지 못했던 시간이었다.
심리학자 칼융(Carl G. Jung)은 인생에 있어서 사십대의 나이에 접어드는 것을 ‘오후의 삶(The afternoon of life)’ 이라 설명하며 이것은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채 인생의 오후로 단계를 밟는 것이고, 우리는 인생의 아침 프로그램에 따라 오후의 삶을 살 수는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인생의 중간항로를 거치는 위기의식은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이혼, 실직, 투병, 배우자와의 사별 등 충격적인 사건을 겪으면서 깨닫게 되기도 한다.
나에게는 상담소를 들락거리며 적응하기 힘들었던 전업주부의 일상이 시작된 그 때가 난생 처음 겪는 위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 나는 상담을 받았던 것이 계기가 되어, 학부 때의 전공과 관련이 있는 미술심리치료사가 되기 위해 마흔이 넘은 나이에 대학원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대학원에 입학하고 보니 저마다 사연은 달랐지만, 심리적위기를 겪은 후 상담자가 되기 위해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여성들이 상당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연구의 참여자인 선미씨(가명) 역시 그 중의 한 사람이다. 대학원 오리엔테이션이 있던 날, 이제 막 학부를 졸업하여 나이차이가 제법 날 것 같은 친구들 사이에서 쭈뼛거리며 넓은 테이블에 앉아있었던 내 옆으로 조용히 다가와 자리를 잡고 앉던 사람이 바로 선미씨였다. 그 자리의 인연이 지속되어 그녀와 나는 대학원 생활 내내 짝꿍이 되었고, 서로 상담사가 되고자 했던 계기에 대해서 많은 대화를 나누며. 아팠던 기억을 공유했다.
Schlossberg와 Waters, Goodman(1995)은 생애사건(life events)이 누구나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긍정적, 부정적인 사건으로 변화와 적응이 필요한 사건이라고 하였다(권재경, 2017 재인용).인생의 사계는 계절만큼이나 전환기로 점철되어 있다(Levinson, 1978). 생애 전환기는 인생의 주기 가운데 어떤 시기에서 다음 시기로 넘어가는 시점으로 인생구조의 변화를 수반하는 전환점이다. 개인의 전환을 촉발하는 생애사건(life event)의 의미에 대하여 Aslanian과 Brickell(1980)은 학습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생애사건으로 직업과 가족에 관련된 사건이라고 밝혔다. 즉 급작스런 해고, 전직 등과 같은 직업관련 사건을 계기로 또는 결혼, 출산 등과 같은 가족 사건을 계기로 학습을 시작하게 된다고 보았다(박현옥, 2016). 그러나 예견된 사건과 예견되지 못한 사건의 차이점은 받아들이는 우리에게 매우 다른 양태로 다가올 수 있다. 선미씨에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자녀의 ‘틱(tic)장애’는 그녀에게 생애사건이 되었다.
선미씨는 평범한 전업주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럽게 찾아온 아들의 틱(tic)증상은 충격과 위기감을 안겨준 것이 당연했다. 그녀는 아이와 함께 병원과 상담소를 오가며 3년이라는 긴 시간을 고군분투하였다. 아들은 완치가 되었고, 이후 그녀는 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녀와 내가 경험한 자기성찰의 결(結)은 분명히 달랐지만, 각자 맞이한 중간항로를 안전하게 지날 수 있는 것은 ‘상담경험’ 임에는 분명했다. 전문상담사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분석’이라는 개인 심리치료의 과정을 겪어야 하는데 이 경험은 상담자 개인뿐만 아니라 전문 치료사로의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실제 상담자들의 자기분석 경험은 많지 않다.
Geller(2005)는 상담자가 정서적, 정신적 기능을 증진시키고 개인의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개인 심리치료를 받을 것을 제안하였다. 상담자가 내담자의 위치가 됨으로써 개인적 역동과 대인관계를 어떻게 이끌어내는가를 심도 있게 이해하고, 지각 하여 역전이의 가능성을 줄이고 전문직에 내재된 정서적 스트레스를 경감하도록 돕는다. 상담자로서 자기분석은 ‘필요’와 ‘공부’, 그리고 ‘자기발전’을 위한 단발성이 특징이라면, 선미씨와 내가 겪었던 상담경험은 ‘치료’ 과정이었다는 것에서 차이점이 있다. 이러한 면에서 나와 선미씨가 긴 시간동안 겪었던 상담경험은 상담자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분명한 ‘무기’ 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선미씨가 대학원을 입학하기 전, 평범한 전업주부로 지내던 일상에서 닥친 위기로 인해 받았던 ‘상담경험’ 은 그녀에게 어떠한 통찰을 주었기에 전환적인 삶을 살게 되었는지 그 의미를 현상학적으로 해석하고자하는 욕구를 가지게 되었다. 융(Jung)이 말한 바와 같이 누구나 한 번은 겪을 수 있는 인생의 위기에서,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서 경험해야만 했던 상담은 어떻게 그녀로 하여금 상담자의 길로 접어들게 하였는가? 이에 본 연구는 참여자가 직업적 전환이 아닌, 정체성의 전환을 겪게 된 ‘상담경험’의 의미를 심도 있게 이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우리 인생에서 ‘전환’은 어떠한 방식으로 다루어지는가? 20여 년 전, 대기업 부회장에서 웨이터로 변신해 화제를 모았던 머리가 희끗희끗했던 중년 남성이 있었고, 90년대를 주름잡았던 발라드 가수에서 자동차 영업사원으로 변신한 젊은이도 있었으며, 70-80년대 전 국민이 다 알만큼 유명했던 한 가수는 폐결핵 투병 중에 교회에 다니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목사의 길을 걷고 있다. 매체를 통해 알게 된 유명한 사람들의 기존과 전혀 다른 삶은 우리에게 충격을 주기도 하고, 희망을 주기도 하는데 이 모든 것들이 ‘변신’이라 표현되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의 변신은 직업적 변화로 해석해야 할까? 그들의 인생에서 기존과 크게 달라진 삶의 전환적 의미는 과연 외적인 변신이라는 설명만으로 충분한가? 어쩌면 그들은 더 이상 기존의 직업을 유지할 수 없는 곤란한 상황에 이르러 어쩔 수 없이 ‘전환’을 모색해야만 했던 위기를 겪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방송매체는 그러한 경험의 의미를 궁금해 하기보다는 이후의 변화된 직업으로도 매우 성공적으로 살고 있다는 ‘직업 전환의 성공담’을 전달하는 목적에만 집중했다.
전환의 개념인 ‘시각이 전환되는 것’ 또는 ‘기존의 관점이 바뀐다는 것’에서 나타나듯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활 신념 체계나 인생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는 것’(김한별·허효인, 2017)에 의미를 둔 다면, 우리는 외적인 변화의 현상보다는 그 변화의 기저에 있는 전환적 의미가 무엇인지 고찰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메지로우(Mezirow)는 학습 개념을 도입하여 전환학습(Transformational Learning)이라 하고, 변환과정을 통해 발생하는 성인기의 경험을 10단계로 나누어 전환학습의 이론으로 체계화 하였다. 그러나 본 연구는 참여자에게 드러난 위기와 해결과정을 전환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보되, 메지로우가 단계적으로 체계화한 시선으로는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특히, 중년의 위기를 맞은 성인이 가지는 전환적 의미의 본질은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자신을 재발견하면서, 내면적인 기쁨의 변화를 스스로 이끌어내고, ‘참 나’ 가 되어가는 것이다. 즉, 지속적 알아차림의 재발견을 통한 내가 되어가는 것이다.
중년기 위기는 선미씨처럼 급격하게 맞게 된 위기적 상황과 메지로우가 정리한 전환기적 상황이라는 양가적 위치에 놓이게 된다. 무의식적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수용하여 고착화된 사고의 틀에서 기존의 의미체계와 새로운 의미체계가 충돌하면서 의미관점 왜곡이 장기간 지속되어 중년기에 위기의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관점의 왜곡은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생성된 것으로, 삶의 전반에 총체적인 영향을 주는 순환적인 삶의 일부분인 것이다(정경연, 2017).
융(Jung)은 인간이 겪는 생애 주기별 전환을 ‘개별화 과정’으로 보고 있다. 개별화는 인간이 집합적 존재에서 개별적 존재로 개성화 되어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즉 자신에 대한 정체성이 높아짐에 따라 자신의 내면적 자원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고, 자신의 목적을 잘 추구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현상을 새로운 수준에서 인식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이해할 수 있다. 개별화는 고통스런 전환기와 반복되는 좌절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끊임없는 자기 쇄신을 가능하게 한다(Levinson, 1978).
6년이 지난 지금도 선미씨는 날짜를 잊지 않고 있다. 아침에 남편을 출근 시키고 큰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놓고 둘 째 아이와 백화점에서 시간을 보내던 평범한 주부에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불청객이 문을 두드리던 그 날을.
" 정확하게 기억해요. 동국이(가명)가 초등학교를 입학하던 해 3월 21일. 그 당시에 영어 학원을 보내려고 준비하고 있었어요. 유치원 다닐 때 레벨 테스트를 보고나면 학원 선생님들의 피드백이 너무 안 좋은 거죠. 사실 그게 짜증이 나서 집에 와서 애를 많이 혼냈어요. ‘몰라도 자신 있게 말하면 되지. 넌 왜 그걸 못해?’ 이러면서요. 그래서 결국 영유에 입학을 못하고 일반 유치원에 보내게 된 거죠. 초등학교를 입학하니까 영어를 바로 시켜야지 생각하고 아이에게도 말했죠. 3월 4일이 입학식인데 그날 영어 유치원이 바로 시작하는 걸로 등록을 해 놓았어요. 그날 동국이가 엄청나게 긴장을 했던 모양이에요. 입학식도 하고 하니까 나는 단정하고 멋있게 보이려고 애한테 남방셔츠를 입혔어요. 애가 싫다고 했는데, 억지로 입혔어요. 이미 그전에도 동국이는 셔츠 같은 옷을 불편해 했어요. 단추가 달린 옷을 입혀 놓으면 단추를 하도 만져서 그 단추가 색깔이 변하거나 떨어졌었죠. 저는 단추 만지지 말라며 자주 혼내고 그랬어요. 암튼 입학식이 끝나고 등록해 두었던 영어학원도 곧바로 시작되고, 그렇게 몇 주가 지났는데 애가 표정도 안 좋고, 학교 끝나고 오면 말도 거의 안 하고요. 그러던 3월 21일. 애가 갑자기 소리를 내기 시작 하는 거에요. “음!”이런 소리요. 정말 소리가 너무 컸어요. 처음에 집에서 듣고 그때 저는 틱이 뭔지도 모를 때였으니까 또 애를 계속 혼냈어요. 그런데 애가 소리만 내는 것이 아니라 행동도 이상하고, 고개도 이상하게 돌리고, 손도 막 꺾고, 눈도 깜빡이고 뭔가 이상한 거에요. 그날 밤에 인터넷을 뒤지면서 얘가 틱이구나. 알게 되었어요."
선미씨는 그야말로 ‘남들과 비슷하게’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양육했을 뿐인데 ‘왜 내 아이는 다른 집 아이처럼 잘 따라가지 못할까?’라는 생각에서 쉽게 벗어나기 힘들었고, 동국이에게 이상 증세가 발견되었을 때에도 ‘왜 우리 아이만?’이라는 생각에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부정하는 것이 사실상 먼저였다고 한다. 그녀의 생각은 우리인간에게 지극히 평범하게 일어날 수 있는 심리적 반응이다. 그녀가 아이의 틱 증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까지 소요되었던 시간만큼 아이는 치료과정을 더 겪어야 하지만 당시에 선미씨는 그것을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엄마들은 규모가 크건 작건 아이들 위주의 모임을 가지게 되기 마련이다. 그녀는 그런 모임에서도 결혼 전 다니던 회사에서 받았던 스트레스를 똑같이 받고 있었다. 조기영어 교육이 한창 유행을 하던 시절, 동국이와 함께 다니던 유치원 엄마들의 모임에서는 영어 유치원은 강남으로 보내는 것이 좋다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지능발달에 좋다는 각종 해외 브랜드의 놀이학원 등이 국내로 들어와, 불안한 그녀의 마음을 더욱 부추기고 있었다.
선미씨의 남편은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회사원이다. 적은 월급은 아니었지만, 좋다하는 모든 것들을 아이에게 다 가르치기에는 부족했다. 그녀는 엄마들의 모임에서 언급되는 교육시설에 아이를 보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입학 테스트에서 번번이 거절을 당하고 나서 겨우 초등학생이 되어서야 영어 학원에 가게 된 동국이가 사실상 그녀는 못마땅했다. 그랬던 아이가 학원에 보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알 수 없는 신체 증상을 보이기 시작하자, 그녀는 아이를 도무지 이해 할 수 없었다. 정신적인 불안에서 비롯된 소아 우울증 또는 틱 증상과 같은 심리적 장애요소를 가진 자녀의 부모는 치료과정인 상담을 통하여 경제적 부담뿐만 아니라 ‘죄책감’까지 얻게 된다. 그러나 그녀가 가장 먼저 만나게 된 감정들은 ‘회피’, ‘원망’, ‘분노’와 같은 것들이었다.
흔히, 아이들이 눈을 자주 깜빡거리는 행동이 ‘틱(tic)’증상의 전부인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틱(tic disorder)은 스스로 조절하기 힘든 갑작스럽고 단순하며 반복적인 동작(운동 틱)이나 소리를 내는 현상(음성 틱)을 뜻하는데, 이 증상은 7-8세 전후에 가장 많이 나타난다. 이는 기질적 원인, 심리적 원인 또는 복합적 원인으로 인해 발생되기도 한다. 그러나 동국이는 눈만 깜빡거리는 한 가지 증상의 틱이 아니라 소리까지 심하게 내어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수업을 진행할 수 없으니 집으로 데려가시는 것이 좋겠다.’ 라는 전화를 여러 번 받을 정도의 심각한 뚜렛장애증상을 보인 것이다.
선미씨는 더 이상 아이를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고, 소리를 내는 바람에 학교 수업에서도 방해가 되는 것이 당연하였으므로 급하게 그녀의 큰동서(형님)에게 자문을 구하여 상담소를 찾아갔다. 그녀는 남들에게 알리는 것이 싫어서 평소에 왕래도 없던 형님에게 전화를 걸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의 큰동서는 상담대학원을 졸업하여 현재 전문 상담가로 일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동서로부터 소개받은 심리상담소의 소장은 약물치료를 지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긴 시간과 고통이 따를지라도 진정성 있고 올바른 상담이 해결책이라고 믿었던 사람이기에 그녀가 느끼는 상담시간은 더디게만 흘렀다.
신체화 된 증상이 아이로부터 표출된다는 것은 아이의 불안이 극대화 되어서 행동이나 소리로 분출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을 인위적인 약으로 분출구를 막는 셈이 되기 때문에 극구 반대한다는 것이 상담소장의 철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약을 먹으면 증상이 금방 없어진다.’는 말을 주변에서 듣고 상담사 몰래 다른 병원의 의사를 찾아가 약을 처방받고 아이에게 약을 먹이기 시작하였다. 아이의 증상은 일시적으로 멈추었지만 아이는 소파에 앉은 채로 잠이 들어버리거나, 학교에 가서도 점심시간에 밥을 먹지 못할 정도로 책상에 엎드린 채 깊은 잠에 빠지는 등의 부작용을 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에게서 동정심보다는 불편함을 먼저 느꼈다. 더구나 상담센터라는 곳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인들은 마치 내 아이가 정신적으로 큰 문제가 있어서 오는 것 같다는 낙인을 가지기 때문에 그 발길이 무겁게 만 느껴지는 것이다.
연구자 : 왜 아이에게 약을 먹인 사실을 상담사에게 숨겼어요?
참여자 : 제가 상담선생님에 대한 100% 믿음이 없었건 것 같아요. 애가 몇 달을 상담 받아도 증상이 별로 좋아지지도 않고 들쑥날쑥 했었거든요. 그런데 약을 먹으면 일단 증상은 싹 사라져요. 신기할 정도로요. 그래서 상담선생님한테 말은 하지 않고 몰래 몇 번 병원을 찾아가서 약만 타오고는 했었어요. 아이가 당장 막 소리를 내니까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어요. 그리고 마트나 공공장소에 아이를 데려가기가 솔직히 좀 창피했어요. 소리를 내면 주변에서 다 쳐다보잖아요. 그러니까 약을 안 먹일 수가 없었어요.
그녀는 비록 상담사의 주장이 맞는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눈앞에 보이는 아이의 음성증상을 견뎌낼 힘은 부족 했으며,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받을 눈총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해 주고 싶었다.
상담실 문을 두드리는 내담자들은 일정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오기 때문에, 자신이 곧 시작할 상담이 문제만 해결하면 얼른 돌아갈 수 있는 짧은 작업이라고 착각한다. 사실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큼이나 상담자와의 관계를 경험하는데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는 것을 짐작하지 못하고 찾아오기 마련이다. 상담은 문제해결의 작업이기 전에 상담자와 내담자가 긴 시간을 거쳐 의미 있는 관계가 되어 보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상담은 ‘여정’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 그녀는 상담을 하는 과정에서 초반 1년 동안은 상담자에게 솔직하지 못했다고 했다.
상담은 상담자와 내담자의 관계 형성에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한국 사람들은 심리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는 경험을, 타인에게 쉽게 발설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상담 전문성에 관한 신뢰뿐만 아니라 상담이나 심리치료를 받는 것에 대한 낙인 역시 전문인의 도움추구 의도를 낮춘다는 선행연구 결과들이 있다(Cooper, Corrigan, & Watson, 2003; Corrigan, 2004; Corrigan, Druss, & Perlick, 2014).
타인의 시선에 늘 좌불안석 했던 선미씨는 하루빨리 아이가 치료되기만을 바랄 뿐, 자신을 온전하게 개방하지 않은 채 형식적으로만 상담에 임하고 있었다. 동국이의 틱 증상은 완화가 되는 때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더 심각해져 가고, 그녀는 이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지쳐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