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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문식 Sep 21. 2020

남한산성에 오르며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적인 보물이 된 것에 위안을 얻을 뿐이다

  남한산성은 치욕의 역사를 안고 그날에 멈추어 있다.                                 

인조의 치욕이 살아 숨 쉬는 남한산성에 올라 민족의 한을 들여다보았다. 원초적인 단풍이 슬픈 사연을 품고 예나 지금이나 말없이 단풍구경 나온 사람들을 맞이한다. 인조가 이곳 남한산성에서 45일 만에 식량부족으로 성문을 열고 나가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올렸다. 삼배구고두는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두드려야 하는 항복 의식이다. 이때 인조는 신하의 의복인 남색 옷을 입어야 했고, 인조의 머리가 땅에 부딪치는 소리가 청나라 황제의 귀에 들려야 했기에 인조의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청나라 황제는 볼모로 인조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과 사대부의 딸들과 많은 우리 백성들을 끌고 갔다. 역사적 기록에는 이들의 수가 50만 명에 이른다고 하였다. 조선 인구의 5%~10%가 끌려갔는데 그들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압록강에 투신하여 죽은 사람도 많았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나라에 때를 맞추어 예물을 바치게 되었다. 청나라로 가는 사신들의 임무는 세금과 청의 황제에게 공물을 갖다 바치는 일이었다. 이는 조선에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끼쳤다. 또한 전쟁 중에 포로로 끌려간 조선의 백성들을 다시 찾아오는데 많은 비용을 지불하여야 했고, 청나라의 수도에는 조선인을 팔고 사는 인간시장이 있을 정도였다. 청나라 사람들에게 강간당하거나 첩으로 살다온 경우가 많다 보니 정절을 우선시하는 조선사회에서는 이들을 오히려 격멸하고 천시하였다. 끌려가서 모진 고초를 치른 것도 억울한데 가족과 고향 사람들의 냉대에 그들은 원통함만 안고 살았다.  

   

  수어장대守禦將臺는 남한산성 안에서 최고봉인 일장산 꼭대기에 위치하여 성 내부와 인근 주변까지 바라볼 수 있다. 이곳은 우리에게 보고 깨닫고 살라는 메시지를 준다. 건물의 바깥쪽 앞면에는 ‘수어장대’, 안쪽에는 ‘무망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이런 억울한 사연이 되살아나서 그런지 수어장대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인증 샷 하나 찍고 말없이 서 있는 사람들도 많다. 어떤 젊은이가 우리 일행들의 단체 사진을 찍어준다고 자청하여 경건한 마음으로 우리 모습을 담았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 4 장대 중의 하나로 인조 2∼4년 사이에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이며 요새 방어를 맡은 수어사가 병사들을 지휘하던 곳이다. 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인조가 친히 수성군을 지휘하면서 청나라의 12만 대군과 45일간 항전하던 곳이고, 죽어서 살 것인가 아니면 살아서 죽을 것인가 참으로 답이 없는 문제에 봉착했던 곳이다. 조선은 삶과 죽음의 기로에 놓여 실천 불가능한 정의만 있고 실천 가능한 치욕만 있었다. 그렇게 치욕의 역사는 살아남아 기억하라는 교훈만 남겼다. 패전국이 된 조선의 조정은 병자호란이 끝났어도 변하지 않았다.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서인들은 분쟁을 더욱 심화시켜 분파되었고 이후 영·정조 시대에 이르기까지 탕평책이 왕들의 첫 번째 정책이 될 정도로 부담을 주었다.


현재 우리나라가 처한 국제정세는 병자호란 이전과 비슷한 점이 많다. 중국의 대국굴기의 부상, 일본의 전쟁을 하겠다는 의지, 미군 철수 의심, 북한의 핵위협, 사드 배치와 무역전쟁, 중국이 경제적으로 보복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강대국의 눈치만 보는 형국이다. 여기에 일부 정치인들의 믿을 수 없는 행동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강대국들이 언제 경제적, 정치적 보복에 이어 군사적 행동까지 감행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국력을 기르고 안보에 최선을 다 할 때이다.     


  남한산성은 1950년대에 이승만 대통령이 공원화시켜 현재 도립공원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조선 인조와 숙종 때에 각종 시설물을 세우고 성을 증축하여 오늘날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2014년에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남한산성 주변에는 신갈나무와 갈참나무, 서어나무, 밤나무, 잣나무, 아카시아 등이 군락을 이룬다. 산성로터리, 북문, 서문, 수어장대, 남문, 산성로터리로 내려오는 코스는 산성의 맛을 느끼게 한다.     


  역사의 숨결을 느끼며 남한산성의 숲길을 마음대로 걷노라니 상대를 제대로 분석하지 못하고, 명분만 앞세워 현실을 간과한 인조의 무능함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그런 인조에게 화친론자 최명길과 항전론자 김상헌이라는 두 명의 신하가 있었고, 이들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조정에 충심을 전하는 사람들이었다. 두 충신의 상반되는 주장 속에서 갈등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인조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른다. 한 때는 굴욕적인 역사의 현장이었지만 지금은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적인 보물이 된 것에 위안을 얻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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