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촌 아이들은 부족한 것이 많아도 부러운 것이 적다
가장 부족한 것이 많았던 시절에 남들을 조금 부러워했던 그 시절이 그들만의 그리운 추억이 되었다. 누구나 나이 들면 고생스러웠던 시절이 더 생각나고 그 시절을 다시 보고 싶어 한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처럼 젊어서 고생하면 이후에 어려운 일을 당해도 헤쳐 나가기 쉬우니, 젊은 시절의 고생은 고의적으로 해보는 것도 좋다는 뜻이다. 그들에게 어린 시절의 어려움이 있었기에 성인이 되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들의 부모님이 고생한 삶을 생각하면 안타까워 꺼내지도 못했는데 이제는 즐거운 마음으로 말한다.
여름밤에 옥수수를 검정 솥에 넣고 쪄서 온 식구가 둘러앉아 먹으면 옥수수 맛과 마당에 피워놓은 모깃불이 화답하였다. 아이들은 밀집 방석 위에 누워 어둠을 밝히는 별을 보고 상상의 나래를 폈다. 밤하늘의 뒤쪽에서 선을 긋고 나타나는 별똥별을 보고 황홀감에 빠져들곤 하였다. 밀짚 방석은 공기 소통이 잘 되어 건강에도 좋았고 곡식을 건조하는데도 안성맞춤이었다. 낮에는 밀짚 방석 위에 펼쳐놓은 붉은 고추가 한가로운 시골 풍경을 더해 주었다.
장마철이 되면 비가 많이 내려 산골짜기에서 큰 물이 내려오고 동네 가운데로 난 작은 개울이 넘쳤다. 개울에 큰 돌이 떠내려 오기도 하고 개울가에 서 있던 물풀이 같은 방향으로 하나같이 넘어져 있었다. 길가에는 어디서 나왔는지 미꾸라지가 꿈틀거렸고 흙탕물과 맑은 물이 섞여 흘렸다. 그 물속에 들어가 물장난하는 것은 산골 아이들만의 놀이였다. 개울가에 검정고무신을 벗어놓고 물을 담아 개울에서 송사리, 미꾸라지, 물방개를 잡아 고무신 속에 넣고 물고기가 노는 모습을 보며 놀았다.
한여름에 무더위를 이기는 방법도 간단했다. 아이들이 하나둘씩 마을 동네 어귀에 모이면 걸어서 한참을 가야 하는 옆 동네 큰 냇가로 향했다. 피부 색깔은 모두 까무잡잡하게 그을려 있었지만 오히려 그 모습이 건강미를 더해주었다. 큰 냇물은 맑고 시원하였으며 안전하게 물놀이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모든 아이들이 자기만의 장소에 검정고무신을 벗어놓고 그 위에 입었던 옷을 벗어 올려놓았다. 수영복도 없이 모두 발가벗고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자기에게 알맞은 곳에서 목욕하며 개헤엄을 자연스럽게 배웠다. 수영이 미숙하여 코로 물을 들이켤 때도 있었지만 물놀이를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학교에 오갈 때면 뜸부기가 논에 숨어서 가끔 울었다. 뜸부기는 흔한 새였고, 뜸부기 소리도 정겹고 친숙한 소리였다. 뜸부기를 닭과 비슷하다고 '뜸부기 닭'이라 불렀고 경계심이 많아 벼 포기에 몸을 숨기고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눈에 띄지 않았다. 이제는 뜸부기가 사라지고 뜸부기 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머리가 굵어지면서 발길을 저수지로 돌렸고 수영 실력은 점점 향상되어 저수지를 가로지를 수 있게 되었다. 저수지의 폭이 좁은 곳의 거리가 50m 정도이고 깊은 물인데도 왕복할 수 있는 수영실력을 갖추었다. 자연스럽게 무리 지어 저수지를 오고 가도 누구 하나 위험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야말로 방목하는 망아지 새끼들처럼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였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고달픈 생활일지라도 그들은 행복했다. 이 무렵에 놀이가 바뀌어 수영 대신 낚시를 하게 되었다. 낚싯대는 마을 뒷산에 있는 대나무를 잘라 만들었고 낚싯줄과 낚시는 부모님을 졸라 5일장에 가서 구입하였으며 미끼는 보리를 볶아 떡밥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보통은 붕어나 피라미를 몇 마리 잡는 것으로 만족했는데 운이 좋은 날에 메기를 잡아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가을이 되면 산과 들에 온통 잠자리 세상이 펼쳐졌다. 꼬마잠자리, 밀잠자리, 고추잠자리 등 종류도 다양했다. 잠자리가 앉아 있는 2m 앞쯤에서 집게손가락을 펴고 빙글빙글 커다란 원을 그리며 다가갔다. 가까이 갈수록 원을 작고 빠르게 그렸다. 손가락으로 원을 계속 그리면서 다른 손으로 잠자리의 날개를 잡았다. 잠자리의 큰 눈은 수많은 낱눈들이 모여 있었다.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면 판단력이 흐려져 움직이지 않게 되는데 이 순간을 이용해 잠자리를 쉽게 잡을 수 있었다. 잠자리채도 없이 잠자리를 잘도 잡았다. 잡은 잠자리를 가지고 놀다가 불쌍하다고 놓아주면 ‘나 살려라’하고 하늘 높이 힘차게 날아갔다.
가을철의 들판은 하나의 곡식창고였고 등하교 길에 그들을 반겨주는 허수아비가 논 가운데에 서 있었다. 논 주인이 짚으로 사람 모양을 만들고, 헌 옷을 입히고, 머리에는 헌 밀짚모자를 씌워, 논 가운데에 세워 놓았는데, 참새를 쫓기 위한 작업이었다. 허수아비는 변함없는 모습으로 묵묵히 소임을 다하는 그들의 영원한 친구였다.
시간이 지나 벼가 익어가고 추수할 때가 되면 맨 먼저 논에서 일일이 벼를 베어 논에 눕혀 놓고 벼가 마르면 볏단을 묶어서 논두렁에 줄을 세웠다. 논두렁마다 줄 서 있는 볏단의 행렬이 풍요로웠다. 이 볏단의 행렬은 시간이 지날수록 동네 어귀 가까운 길가로 점점 이동하였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볏단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어도 주인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잘도 구분하였다. 짓궂은 아이들이 볏단 위로 올라가 걸어가면 볏단이 넘어지고 이 광경을 목격한 주인이 야단을 치면 도망가느라 바빴다. 바심할 때가 되면 볏단은 주인집 마당에 볏가리가 되었다. 볏가리는 도리깨와 홀태를 사용하여 바심을 하였다. 홀태는 천치라고도 부르고 모양은 큰 머리빗과 같았다. 쇠로 된 긴 이빨 20여 개가 틀에 고정되어 있었고 4개의 다리가 균형을 잡았다. 이빨 사이에 벼를 끼우고 잡아당겨 훑음으로써 곡식의 알갱이를 떨어냈다. 작업할 때에 틀이 흔들리지 않도록 앞다리 가운데에 나무를 가로 대어 디디도록 발판이 있었다.
탈곡이 끝나면 갈퀴로 짚을 걷어냈다. 바심의 뒷마무리는 어머니들의 키질로 가름하였다. 볏짚은 차곡차곡 집 뒤 공터에 쌓이고 땔감, 소여물 재료, 초가지붕 이엉 엮을 재료, 새끼 꼬는 재료 등으로 요긴하게 사용하였다. 추수한 벼는 말려서 가마니에 넣어 방에 높이 쌓아놓기도 하고 마당에 곡식 저장고를 만들어 놓기도 하였다. 이것이 그 농가의 부를 말하는 가늠자가 되었다. 가을 추수가 끝나면 저장하는 방법이 어려운 일이었다. 방마다 벼 가마니를 쌓아놓고 마당에는 고구마 저장고를 만들어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다. 겨울에 고구마가 얼까 봐 밖에 있는 것부터 먹었다. 그 많던 고구마 무더기가 시나브로 줄어들었다. 김치와 함께 먹는 고구마는 식량 대용으로 아니면 군것질용으로 안성맞춤이었다.
늦가을이 되면 어머니들은 김장 준비에 열을 올렸다. 밭에서 여름 내내 가꾼 배추와 무를 뽑기 시작했다. 유일한 운송수단은 지게나 소달구지였으며 보통은 지게에 배추를 가득 짊어 날랐다. 집집마다 몇 백 포기씩 김장을 할 때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품앗이로 번갈아가면서 도와주었다. 이웃 간의 정을 나누며 무와 배추를 같이 씻고 버무렸다. 옛 추억의 물건이 되어 사진 속에서나 볼 수 있는 대형 대야가 김장할 때마다 필수품으로 등장했다.
농촌에서 어머니들이 하는 일은 다양하였다. 아궁이에 불을 피워 삼시 세끼 밥 짓기, 빨래하기, 옷 깊기, 밭농사 등 끝이 없었다. 어머니들의 이름은 모르고 누구 ‘엄니’라고만 했다. 어머니들이 물동이에 물을 가득 담아 머리에 이고 갈 때면 똬리의 끈을 입에 물고, 물동이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면 손으로 흩뿌리며 걸었다. 햇볕이 좋은 날에는 마당의 빨랫줄에 빨래가 줄을 서서 보송보송할 때까지 걸려 있었다. 아이들이 이 기회를 놓칠세라 빨래 사이에 숨으면 술래가 빨래 밑으로 보이는 발을 보고 찾아다녔다. 빨래가 마르면 어머니들이 숯불 다리미로 어른들의 옷만 골라 다림질하였다.
겨울밤이 되면, 하얀 눈이 아무도 모르게 저 혼자 내려 마당이고 장독대고 지붕이고 나뭇가지에도 하얀 세상을 만들었다. 달도 별도 없는 밤이라도 눈은 제 스스로 온 세상을 덮어 놓았다. 어디선가 어깨 위에 앉은 눈을 털어내는 소리가 들리고, 신발에 묻은 눈을 발로 터는 소리도 들렸다. 밤이 깊도록 눈이 쌓이고 건너 집의 개 짖는 소리만 정적을 깨뜨렸다. 그때는 눈도 많이 내렸다. 날이 밝으면 사람들은 밤새 쌓인 눈을 집안과 대문 주변만 쓸었다. 아이들은 눈밭에서 뒹굴고 온 몸에 눈을 묻히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운 시절의 할아버지들은 백의민족답게 흰 한복에 갓을 쓰고 다녔다. 남자 어른들은 지게를 이용하여 물건을 운반하였고 어머니들은 아기를 등에 업고 물건을 머리에 이고 다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5일장이 되면 산기슭의 작은 길을 따라 장으로 가는 하얀 행렬이 줄을 이었다. 저녁 무렵에 뒷산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각 가정의 굴뚝에서 모락모락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 연기가 낮은 하늘에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참으로 평화로웠다.
산촌 아이들은 눈이 쌓인 날에 산토끼를 잡겠다고 새끼줄로 양말과 바지자락을 동여매고 곧잘 뒷산에 올랐다. 그들은 열심히 토끼 발자국을 따라 산을 헤맸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나중에 그 이유를 알았다. 그 기술은 눈 위에 난 토끼 발자국을 쫓아갈 때 토끼 발자국이 지나간 곳 양쪽에 장애물을 놓고 가운데에 철사로 올가미를 설치해야 했다. 그러면 토끼가 잠을 자다가 사람이 나타나면 도망을 가고 산모퉁이를 한 바퀴 돌아 원래 자리로 다시 오다가 올가미에 걸린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아이들은 계속 쫓아다니기만 하여 토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동네 아이들은 추우면 추운대로 눈사람을 만들고 눈 위에서 뒹굴며 추위를 이겼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밭을 걸으며 뒤돌아보면 새하얀 눈에 찍힌 아이들의 발자국만 있었다. 날씨가 추워도 동네 변두리 언덕에서 비닐 비료포대로 썰매를 만들어 탔다. 그때는 해진 옷을 입어도, 양말을 꿰매어 신어도, 부끄러운 줄도 몰랐다. 할아버지들은 화롯불을 옆에 놓고 긴 담뱃대를 항상 물고 계셨다. 겨울밤은 추웠지만 산촌 사람들의 마음은 항상 따뜻했다. 그 삶은 기다림이고, 희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