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흔적을 보며

벌거벗은 늙은 호박이 버림받았다

by 명문식

늙은 호박이 젊은 시절에 하늘 높은 줄도 모르고 덩굴손으로 여기저기 닿는 곳마다 움켜쥐고, 헛간에 기어올라 바람결에 늙어 이제는 내려오지 못한다. 어느덧 늙어 쭈글쭈글 울상이 되고, 찬 서리를 맞았다. 아래를 보니 잎사귀는 서리에 축 늘어져 버석버석 말라가고, 앙상한 줄기가 기어오른 흔적을 남기고, 헛간 지붕 위에서 골진 모습으로 누워있다. 작은 지붕 위에 살아온 대로 누워 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며 집주인이 모셔갔다. 집안으로 모셔가 거실 구석에서 하얀 계절을 기다린다. 그러나 운이 나쁜 늙은 호박 하나는 아직도 나뭇가지에 매달려 시들시들 생기를 잃어간다. 높은 가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벌거벗은 늙은 호박은 버림받았나 보다.


지난날 할머니들은 해마다 늦가을이 되면 늙은 호박을 툇마루에 가지런히 놓아두셨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가 먹을 모습을 상상하시고, 주름진 얼굴에 환한 웃음 지으시며 말씀하셨다.

"할머니가 키운 것이니 남기지 말고 먹어라."

해마다 할머니는 호박을 사랑으로 심으시고, 늙은 호박에서 보람을 보았다. 그곳에는 능청스럽게 누워 꼼짝도 하지 않고, 잠들어 있는 늙은 호박 한 덩이가 깊은 주름으로 숨어 있었다.


우리가 볼품없다고 말하는 늙은 호박 덩어리도 홀로 꽃 피우고 맺혔다. 한순간도 허투루 살지 않았고, 숨찬 더위에서 찬 서리 내릴 때까지 지칠 줄 모르며 살아왔다. 생김새만으로 늙었다고 구박하면 늙은 호박은 억울하다. 늙은 호박을 여름에 수확하지 않고 익을 때를 기다렸다가 수확하는 것은 오래 참은 만큼 영양가도 많고 활용도가 높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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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타임스가 선정한 10대 건강식품 중 하나로 늙은 호박을 들었다. 늙은 호박은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해 성인병 예방에 좋고, 피부 미용과 노화 방지, 자외선을 차단에 효능이 있다. 이뇨 작용과 해독에 좋아 출산 후 부기를 뺄 수 있으며, 위장기관이 약한 체질에 기력을 회복하고, 감기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 호박전, 호박죽, 호박떡, 호박 수프, 호박씨 등 겨울철 별미를 즐기기에 좋은 식품이다.


사람도 호박의 일생을 닮았다.


태어나고, 자라고, 열매 맺고, 늙고, 생을 마감한다. 길고 짧음의 차이는 있지만, 사람은 검은 머리가 백발이 되고 늙은 호박은 초록에서 연한 붉은색으로 변하는 과정은 똑같다. 늙는다는 것은 배우고 적응하며, 바람 부는 대로 엎치락뒤치락 변하는 삶이다. 나이가 들어 아픈 곳도 많고, 걸음도 더뎌지고, 허리도 아프며, 지팡이에 의지하는 어르신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늙은 호박의 마음을 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