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노인이 삶의 끝자락에 있었다. 그의 눈에는 흐릿한 기억과 빛나는 순간들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했던 따뜻한 순간부터 청춘의 열정과 사랑을 느꼈던 소중한 시간,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과의 행복한 순간들을 회상했다. 또한, 어려움 속에서 스스로 극복했던 시련과 깨달음도 떠올렸다. 비록 이룬 것은 많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은 감사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노인들의 긍정적인 감성 변화는 여러 측면에서 나타난다. 이는 감사와 만족, 감정 조절 능력, 사회적 관계에서의 만족, 낙천적인 태도, 자아실현과 성취감 등에 반영된다. 이러한 변화는 노인의 삶의 질을 향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삶을 이해하고, 각 시기에 어떤 도전을 경험하는가에 따라 인생이 행복한 시기가 되거나 어려운 시기가 되기도 한다. 자기가 처한 환경에 따라 삶이 만족스럽고 행복한 시기를 보낼 수도 있고, 반대로 고난과 스트레스, 불안 등을 경험하는 어려운 시기가 될 수도 있다. 노년에는 흐르는 물소리가 인생의 지친 삶의 소리로 들리기도 한다.
인생은 모든 것이 지나갈 뿐이다. 나를 걱정해 주는 가족이 있어 위안을 얻을 뿐이고, 어제와 오늘만이 존재할 뿐이다. 부부간에도 젊은 날에는 동반자였으나 노년이 되면 서로가 재산일 뿐이다. 남편은 아내가 재산이고, 아내는 남편이 재산이다. 재산이 없으면 모든 면에서 불편하고 힘들어진다. 노년의 삶은 그리움을 반복하는 과정이다. 현명한 노인은 부르는 곳에는 무조건 달려가고, 부부간의 말다툼이 생기면 무조건 양보하며, 즐거운 마음을 가진다.
'노인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에 '성취감과 유대감, 자존감이 노년의 삶을 유지해준다.'라고 답한다. 그러나 유대감과 자존감은 해결하기 쉽지 않은 노년의 숙제이다. 이 문제는 세대별로 다르고, 남녀가 다르며, 건강과 경제적 상황, 가치관에 따라 다르다. 노인들은 일하기에는 너무 힘들고, 은퇴하기에는 너무 젊어 삶의 혼란을 겪는다. 늙음에 대해 사회는 개인의 문제로 생각한다. 늙은 부부는 고목처럼 존재만으로도 귀하며, 세월의 흔적이 그리움을 주고, 의연한 관계를 내포하여 우리에게 아련함을 준다.
나이가 들면, 어떻게 늙어야 할지, 남은 삶에서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어떻게 놓아야 할지 혼란을 겪는다. 가족의 안정이 가족 구성원들에게 행복을 주고, 겸손과 너그러움, 당당함을 준다. 자손을 너무 사랑하여 손자, 손녀를 도맡아 양육하기도 하고, 자신의 건강을 해치기도 한다.
수필가 올리버 웬델 홈스는 "사람은 늙어서 활동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활동하지 않기 때문에 늙는다."라고 했다. 노년의 걷기는 단순히 장소를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소통하는 자기 성찰의 기회가 된다. 노후 준비가 미흡한 노년은 외로움과 고독감, 깨진 희망과 뒤틀린 인간관계를 아쉬워하며 살아간다. 그들은 늙어가면서 건강과 희망을 잃고, 가족들로부터 버림받기도 한다. 노인들은 안타까운 사연을 품고, 모든 것을 참으며 새로운 삶을 만들어간다. 그들이 집 밖에 나가면 어른의 자리는 사라지고 독거노인 문제만 드러나며, 폐휴지를 주워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는 사람도 생긴다. 신체기능의 저하, 인지 장애, 낮은 자존감 등의 부정적인 감정만 쌓인다. 이들은 돋보기를 쓰고 자신이 보는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간다. 돋보기를 썼다 벗었다 하는 것이 귀찮아 안경을 쓴 채로 아래위로 시선만 이동한다. 그들에게는 수많은 안경이 있고 그들만의 안경으로 세상을 보고 느낀다. 어떤 안경으로 세상을 보는가에 따라 희로애락이 달라진다.
약에 의존하며 사는 노인은 복용하는 약의 종류만 늘어난다. 장수사회가 되면서 인생의 많은 시간을 노년으로 보내게 되고, 그 말년은 아픔으로 가득 차게 된다. 불면증에 시달리고 허리와 다리가 아프며 자주 병원을 찾는다. 노안과 백내장은 필수 관문이며, 안질환에 시달린다. 많은 노인이 고혈압 약을 먹고, 당뇨병에 시달리며, 가만히 앉아 있어도 눈, 허리, 목 등이 아프다. 젊은이는 젊어서 아프지만, 노년은 몸과 마음이 늙어서 더 아프다. 그래도 그들의 마음은 항상 젊은 날에 머물러 있다. 나이 들어 아픈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늙는 것을 아파할 필요는 없다.
신앙생활은 노인들에게 개인의 삶에 의미를 주고 사회 환경에 대처할 기회를 제공한다.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신앙인들의 80%가 구성원들 간의 접촉과 유대감을 통해 사회적인 지지와 도움을 얻는다고 응답했다. 많은 노인은 믿음으로 노년의 생활에 감사하는 마음을 얻고, 행복을 추구하며, 위안을 받는다. 이러한 위안은 노인들에게 특별한 선물이자, 의지의 삶이 된다. 노년에는 현재보다 과거의 삶이 더 그립다. 사람의 몸도 오랫동안 사용하면 자연히 마모되어 노인이 되고, 부축을 받아야 하는 삶이 된다. 나이 든 사람들은 작은 일에도 상심하고 눈물도 많아지고 비관적으로 생각한다.
"늙어야 늙음을 안다"라는 속담이 있다. 이는 어떤 경험이나 지식은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청소년 시절에는 패기를 앞세워 행동하다가 나이가 들면 그 행동이 무모했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독거노인에 대한 관리는 봉사자들이나 복지 요원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가족의 울타리가 무너진 사회에서 노인들이 살아가고 있다. 노인에 대한 공경심이 사라지고, 홀로 작은 방에서 외로움과 씨름하다 고독사하는 독거노인도 있다. 이들의 삶은 처절한 생존을 위한 일상으로 가득 차 있다. 환영받지 못하는 곳에 모여 소일하는 것이 노인의 길이라고 생각하면, 마냥 슬픈 일이다.
늙는다는 것은 인간의 숙명이며, 이는 삶과 죽음의 길이다. 노인 병원에 가보면, 가족들이 주말마다 찾아와 환자들에게 위로한다. 그때 노인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를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다. 입원 환자들은 기본적인 일상생활에서도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 걷는 것이 어렵고, 식사, 목욕, 화장실 사용 등의 일상적인 동작도 도움이 필요하다. 지속적인 약물 복용과 정기적인 의료진과의 진료도 필요하다. 그곳의 환자들은 가족과의 교류가 제한되고, 주변 환경과 익숙하지 않다. 이로 인해 정서적으로 외로움과 고독을 느낀다. 일상적인 활동과 취미의 제약도 있다. 그들은 다양한 취미와 관심사를 가지고 살아왔지만, 노인 병원 생활로 인해 이러한 여건이 크게 제한된다. 걷기가 어려워 산책을 즐길 수 없고, 시력이 저하되어 TV 시청도 어렵다. 이런 환경에서 즐거움이 심하게 감소한다. 늙음은 원하지 않아도 찾아오고, 가난은 노인을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노인이 가는 길'은 결국 모든 사람이 가야 할 길이다. 그 길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노인이 되면, 얽매였던 삶을 내려놓고, 남은 인생을 의미 있게 살아야 한다. 인간의 죽음은 삶의 마침표이자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는 문이다.
나이가 들어 부모가 되면, 자식을 키우고 가르치며, 자녀들의 성장과 발전을 도와주는 동시에 많은 책임을 지게 된다. 부모가 가는 길은 자녀를 위해 끊임없이 헌신하고 무한한 사랑을 나누는 길이다.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고 예의와 행동의 모범이 되어, 도덕적인 사람으로 자랄 수 있도록 인격과 가치관을 심어줄 의무가 있다. 부모는 자녀들의 고유한 개성을 존중하고 발전시키며, 그들이 자신만의 꿈과 목표를 추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부모의 길은 매우 개인적이며, 가정환경과 문화, 가치관에 따라 다르다. 부모의 길은 나이를 먹은 후에 알게 되고 개인적인 경험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부모의 역할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더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때가 되면 자신의 부모가 자기들에게 어떤 희생과 헌신을 했는지 깨닫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나이 든 사람은 예전처럼 어르신이 아닌 '노인'으로 굳어졌고, 사회적 지위도 낮아졌다. 젊은이들이 말하는 노인의 이미지는 부정적인 잠재의식 속에 쓸모없는 존재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들은 노인들이 가족과 사회에 짐이 되는 존재라고 여긴다. 용모에서부터 행동까지 부담스럽고, 부양해야 하는 존재이며, 나라 경제에 부담이 된다고 생각한다. 노인을 혐오하는 사회 분위기는 온라인에서 노인을 비하하는 말들이 유행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전에는 '노털'이나 '꼰대' 정도로 비하하는 정도였는데, 요즘은 노인을 벌레 취급하여 벌레 '충' 자를 써서 '노인충'이라고도 한다. 비하하는 이유로는 변화하는 세상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말과 행동을 함부로 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공경의 대상이었던 노인이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복지와 일자리 등 사회적 자원의 배분 문제가 하나의 원인으로 청년들의 부정적 인식을 더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인이 하는 일과 청년이 하는 일은 다르므로 노인들이 청년들의 일자리를 빼앗을 수는 없다. 노인들은 대부분 청년이 회피하는 업종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청년들이 원하는 일자리에 노인들이 고용될 수도 없다. 어떤 이유에서라도 젊은이들이 노인을 멸시하는 것은 자신의 앞날을 멸시하는 일이다. 노인을 혐오하는 일은 미래의 나를 미워하는 일이 된다. 세월이 흐르면 젊은이들은 중년이 되고, 중년은 장년이 되고, 장년은 노인이 된다. 노인들의 노력으로 지켜온 이 땅에 청년들이 살고 있고, 청년들이 일구는 세상에서 노인들이 살아간다. 우리는 누군가의 배려와 희생으로 자라왔고, 우리가 베푸는 배려와 희생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든다.
고령화로 청년들의 재정 및 부양 부담은 노인이 만든 문제가 아니고, 어쩔 수 없는 사회 현상이다. 사회 현상에 알맞은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정치권과 기업이 할 일이다. 사회 현상으로 생긴 불만을 노인을 혐오하는 행위로 표출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노인이 되면 대부분 존재의 위치가 달라지고, 지도층의 존재에서 배우는 학생의 처지가 된다. 모든 것을 가르쳐주던 어른에서 손자에게 스마트폰 사용법을 배우는 처지로 변한다. 그러나 노인이 사회에 설 자리가 좁아진다고 무가치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노인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존재하는지도 모르게 조용하다. 복잡한 거리에 나서면 젊은이들은 많지만, 노인들은 자주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