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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문식 Sep 24. 2020

압록강 주변 사람들

남한에 태어난 것만도 행운이 아닌가?

여행지에서 만난 아침은 언제나 싱그럽다. 압록강으로 향한다. 한국에서 가장 긴 강이다. 압록강의 이름은 물빛이 오리 머리의 색과 같은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 유명한 철교가 있고, 강 건너 북한 땅이 보인다. 한눈에 보아도 중국의 단동과 북한의 신의주가 생활의 차이가 보인다. 중국 쪽 강변에는 고층 아파트와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고 지금도 계속 개발 중이다. 가족들끼리 아니면 연인끼리 운동을 하거나 산책을 하며 여가를 즐긴다. 국경인데도 군인은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북한 쪽에는 단층 건물 몇 채가 보이고 강가에서 물고기를 잡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올 뿐이다. 


압록강 다리는 6·25 전쟁 때 유엔군이 폭파하여 끊긴 다리와 전후에 차가 다닐 수 있도록 건설한 다리가 있다. 다시 건설한 철교 위로 가끔 차들이 오간다. 기차는 하루에 한 번만 다닌다. 끊어진 다리 위를 걷노라니 마음이 무겁다. 신의주, 위화도를 한 눈으로 바라보며 한참을 서성인다. 통일의 기회가 언제이었는지 역사는 말하고 있다. 끊어진 철교의 녹슨 철강재들이 우리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지 말한다. 길 위에 서서 많은 역사적 교훈을 배운다. 중국 단동 하구에서 유람선을 타고 평안북도 삭주군 압록강 주변을 따라 유람한다. 압록강의 중앙을 경계로 국경이 나누어지는데 이곳은 국경을 넘어가도 묵인하는 곳이다. 유람선을 타고 북한 땅으로 가본다. 많은 관광객이 앉거나 서서 구경한다. 북한 땅이다. 선실보다 2층 갑판이 더욱 잘 보일 것 같아 2층으로 올라갔다. 햇볕이 너무 따갑다. 북한 쪽을 더욱 관심 있게 살펴보았다. 퇴색된 회색빛 단층 건물들이 취락을 이루고 있다. 북쪽 사람들을 향하여 손을 흔들어도 그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일하는 북한 사람들도 있고 더워서 그런지 윗옷을 벗은 군인도 보인다. 군인이 총을 들고 있는데 총알은 없다고 한다. 인사를 해도 반응이 없다. 어떤 아기 엄마는 5살 정도의 아기를 데리고 강가에 나와 밀물 조개를 잡는다. 아이가 물속으로 자꾸 기어가려고 한다. 갑자기 엄마가 아이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때린다. 우는 아이를 바위 위에 앉힌다. 그리고 하던 작업을 계속한다. 그 옆에서 아이들과 아주머니들이 물고기를 잡는다. 어떤 사람은 큰 소를 끌고 강가로 나왔다. 소가 매끈하게 생겼다. 이들은 물고기를 잡아먹기도 하고 팔기도 한다. 우리가 건네는 말에 응답할 여유가 없다. 북한의 주민 2명이 배를 몰고 우리 곁으로 온다.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니 얼굴을 붉히며 미소로 대답한다. 관광객이 담배 한 갑을 강물에 던진다. 서로 스쳐 지나가고 조금 더 가더니 그들이 담배가 떨어진 곳으로 돌아와 물 위에 떠 있는 담배를 주워 간다. 강변 위쪽 길에는 트럭과 오토바이가 지나간다. 북한의 산 능선을 따라 일군 밭에 옥수수가 자라고 있다. 그런데 중국 땅에서 자라는 옥수수보다 북한 땅의 옥수수가 유난히 키가 작다. 땅에 거름이 적어서 조금만 자랐다고 한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옥수수나 사람들이 이렇게 다른 환경에서 산다는 것을 실감한다. 인간은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느 공동체에 속하느냐에 따라 일상생활이 바뀌고, 인생이 바뀐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람선에서 내려 호산산성으로 출발한다. 호산산성은 천리 장성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비사성이라 부른다. 호산산성은 중국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으로 동북공정 정책에 의해 만리장성 일부라고 주장한다. 길가에 광장이 있고 성 모양의 건축물이 있고 군데군데 망루가 보인다. 호산산성을 출발한 버스는 환인을 향해 달린다. 산들이 많아지고 굽은 길도 많다. 고속도로로 들어선다. 창밖에 옥수수밭이 보인다. 밭의 두둑을 비닐로 덮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아직 농사짓는 데 비닐을 많이 사용하지 않는가 보다. 가는 곳마다 보이는 것은 온통 옥수수 물결이다. 어떻게 그렇게 손으로 일궈 놓았는지 의문이 갈 정도이다. 이 옥수수는 대부분 미국으로 수출한다고 한다.     


환인으로 출발했다. 환인은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나라를 세운 곳으로 졸본성이 있는 곳이다. 졸본성에 주몽이 나라를 세울 때 3,000여 명의 인구가 있었고 이곳에 흐르는 강의 이름이 ‘비류수’이다. 우리의 명산 백두산에 오른다. 백두산을 향하여 설레는 마음을 안고 출발한다. 백두산 서파 코스는 중국 길림성 경계에 위치한다. 입장권과 탑승권을 끊는다. 산책로를 따라 5분 정도 올라가니 버스정류장이 나온다. 버스를 갈아타고 백두산 정상으로 향한다. 산기슭에는 원시림이 줄을 잇고, 중턱에 이르니 야생화가 천국을 이룬다. 안개가 조금씩 나타난다. 불길한 예감이 든다. 백두산 전용 버스는 잘도 올라간다. 산의 정상 부근에 이르니 안개가 점점 많아진다. 버스에서 내려 휴게소에 들어갔다. 사람들로 만원이다. 정상을 향하는 사람들이 비옷을 입고 출발한다. 가마를 타고 가는 사람도 있다. 앞이 거의 안 보인다. 휴게소 바로 앞에 백두산을 오르는 계단이 기다리고 있다. 오늘은 날씨가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다. 어떻게 올라갈지 걱정이 따른다. 친절하게 계단에 숫자가 적혀 있다. 무려 1,400개나 된다. 가슴이 답답하다. 다음에 다시 오란다. 정상에 간 사람들은 푯말만 사진에 담고 돌아온다. 백두산의 의미, 그 이상의 무엇이 작용한다. 휴게소에는 많은 중국인들이 있다. 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라면을 하나씩 갖고 있다. 우리나라 라면인 줄 알았다. 그런데 중국산 라면이다. 어쩌면 포장이 그렇게 비슷한지 구분할 수가 없다. 지금 우리는 한반도에서 제일 높은 백두산에서 서성인다. 


백두산에 오른 사람들은 왜 이렇게 감격할까? 그것은 우리의 소원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사진만 봐도 멋스럽던 매력을 만끽한다. 백두산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이고 중국에서는 장백산이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태극기를 꺼내거나 애국가를 부르면 안 된다. 담배도 피우면 안 되고, 플래카드를 내놓아도 안 된다. 기도나 절을 해도 안 된다. 백두산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백두산을 뒤로하고 금강대협곡으로 간다. 아름다운 금강대협곡의 모습이 나타난다. 천연의 숲을 거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국경은 협곡을 경계로 한다. 이렇게 백두산 등반은 끝났다.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을 수 있는 날을 기다릴 뿐이다. 이번 여정에서 가졌던 기쁨과 아쉬움이 여운으로 남는다. 조국이 통일되어 북한 땅을 지나 백두산에 다시 올라 천지를 바라보고, 대한독립 만세도 외치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하면서 애국가도 부르고, 그 자리에서 똑같은 사진을 다시 찍을 수 있기를 기원한다.     


집안시로 들어가 광개토대왕비와 왕릉을 찾는다. 이곳에는 고구려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광개토대왕비는 실내에서 사진을 촬영하지 못하게 한다. 집안에는 20여 기의 고구려 벽화고분이 산재해 있다. 지나는 길에서 조선족 아주머니들이 오이를 가지고 나와 울타리 밖에서 ‘오이 사세요’라고 외친다. 그 소리는 ‘우리 좀 살려주세요’라고 하는 것처럼 들린다. 이들은 백의민족의 긍지를 살려 하얀 집을 짓고 산다. 중국 사람들이 빨간 지붕으로 지은 집에서 사는 것과 대조적이다. 도착하는 곳마다 화장실에 가야 한다. 이동하는 거리가 멀고 휴게소가 적고 화장실이 없어서 가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 간다. 중국의 변화 속도가 빠르고 우리를 추격한다지만 이곳의 화장실 문화는 아직 거리가 멀다. 통화시에 있는 북한 식당에서 식사했다. 예쁜 북한 아가씨들이 서빙도 하고 공연도 한다. 국경이 가까워서 그런지 공연 모습을 사진도 찍지 못하게 한다. 남한과 북한의 벽이 여전히 크게 존재한다. 가장 중앙에는 중국 손님들을 앉게 하고 우리는 그 주변에 배치되어 있다. 공연이 시작되고 우리의 동요 ‘은하수’를 북한식 발성으로 간절하게 부른다. 우리 민족의 한 많은 노래다. 몇 곡의 노래가 이어지고 중국 손님이 꽃다발을 선물하자 중국 노래도 한다. 우리 일행은 선물하는 사람이 없다. 꽃다발은 그들이 팔고 그들이 선물로 받는다. 꽃을 팔아서 남는 이익금은 자기들이 나누어 갖는다고 한다. 끝 곡으로 ‘다시 만납시다’라는 노래를 부를 때는 너무도 애절하여 분단의 아픔이 되살아난다.     


그들이 무슨 죄가 있을까? 자유를 모르는 그들이 무슨 잘못을 했을까? 우리는 남한에 태어난 것만도 행운이 아닌가? 이번에 만난 가이드는 특별한 사연을 안고 있다. 자기 부모가 지금도 평안남도 안주시에 거주하고 있다. 부모님을 만나려고 가끔 그곳에 간다. 그곳에 갈 때면 자기 돈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잔치를 베풀어준다. 그들은 자기를 성공한 사람으로 생각하며 기다린다. 좋아하는 모습에 보람을 느껴 가끔 찾아가 대접한다고 한다. 그곳의 실상은 어려워도 그곳도 사람이 사는 마을이고, 별로 다를 것이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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