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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문식 Oct 16. 2020

오일장을 찾아서

가슴속 깊은 곳에 묻혀 있던 향수를 덤으로 받았다

옛날이 그립고, 사람 냄새를 맡아보고 싶고, 훈훈한 인심을 만나보고 싶으면 유성 오일장에 간다. ‘장 보러 간다’라는 말처럼 꼭 무엇을 사지 않아도 된다. 유성 구도심에 자리를 잡고 5일마다 장이 서는 날이면 사람들이 몰려들어 정겨움을 나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어김없이 모이는 것도 신기하고, 오랜 세월 전통을 이어 가는 것도 궁금하다. 


시장에 들어서면 속세에 들어선 기분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가 여기에 있다. 할머니들이 밭에서 옥수수, 오이, 푸성귀 등을 가지고 나와 무더기무더기 가게 앞 골목길에 장이 열린다. 길가의 불편한 자리에 앉아 손님을 기다리며 애틋한 사연으로 에누리를 허락한다. 철을 맞은 알록달록한 콩도 나왔다. 만물 장수 아저씨가 파는 물건들은 꽤 신기한 것들이었다. 수도꼭지, 싱크대, 거름망, 샤워기 꼭지, 낫, 칼, 문고리 등 없는 것이 없다. 어떤 농부 아저씨는 강아지, 고양이, 토끼까지 팔고 있다. 강아지와 토끼 모습이 어찌나 예쁜지 한 마리 사고 싶다. 옛날의 우시장이 지금까지 이렇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쇠비름을 팔고 있는 아주머니도 있다. 쇠비름은 나물이 아니라 밭에서 아주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잡초였다. 얼마나 생명력이 끈질긴지 뽑아도 또 난다고 구박받던 풀이다. 그러나 지금은 쇠비름이 관절에 효과가 있다는 방송을 보고, 나물도 해 먹고 효소로 인기가 있다. 과일 장수는 그릇마다 형형색색의 과일을 질서 정연하게 진열해 놓고 손님을 기다린다. 수박이 얼마나 큰지 파는 아저씨도 힘들어하시는데 사서 가지고 가시는 아주머니는 가볍다. 손수레로 이동하는 커피 아주머니, 모시떡을 파는 아주머니도 있다. 이들 앞에는 아낙들이 무질서하게 모여 있다. 정감 있는 큰 플라스틱 그릇에는 미꾸라지들이 몸부림치고 있다. 조금 있으면 어느 집 보양식이 될 것 같다. 나무로 만든 젓가락에 꼬챙이로 만든 따끈한 즉석 어묵도 잘 팔린다.


생선 가게 아저씨가 갈치를 싸게 판다고 소리치니 손님들이 모여든다. 바다에서 나는 꽃게, 갈치, 고등어, 오징어, 해초 등도 있다. 해초는 반찬으로 해 먹으면 식감이 색다르다. 이것저것 구경하며 내려가다 보면 먹을거리 장터가 나오는데 식혜, 수정과, 칼국수, 호박죽, 팥죽, 만두, 순대, 콩국 등이 있다. 사람들이 여기저기 둘러앉아 있고, 콩국에 어묵을 넣어 먹는 사람도 있다. 


기름집이 즐비하게 연이어 있다. 기름집에서 고소한 냄새가 문밖까지 나온다. 손님들은 차례를 기다리며 삼삼오오 짝을 지어 앉아 있다. 어떤 아주머니가 참깨 한 말을 짜서 작은 병 여러 개에 담아 간다. 가볍게 들고 가는 걸음이 마냥 행복하다. 씨앗 가게, 농기구를 파는 집, 그릇 가게, 모종을 파는 집의 주인들은 시골 인심을 나누어준다. 자기 집 문 앞에서 전을 벌려도 불평하지 않는다. 


점심때가 되었다. 길에 야채, 마늘, 호박 등을 조금씩 가지고 나와 팔고 있는 할머니들이 봉지에 싸 온 먹을거리를 드신다. 옆에는 손녀가 좋아라고 따라붙는다. 이 물건 팔아 아이스크림을 사준다고 약속했다며 해맑은 표정이다. 그냥 지나치려니 마음이 짠하다. 


오일장은 추억의 시장이다. 장이 설 때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들의 삶을 만들고 기억 저편의 옛 모습을 재현한다. 부모님을 졸라 물건을 샀던 추억까지 되살아난다. 내 초등학교 시절의 한 페이지가 이곳에 숨어 있다. 나는 이 모습이 즐겁다. 도심 주변에 추억을 곱씹을 공간이 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축복이다. 돌아갈 수 없는 것의 안타까움을 위로받고, 느슨한 삶을 새롭게 만드는 공간이기도 하다. 장터의 소란함이 소음이 아닌 구성진 노랫가락처럼 들리고, 흐르는 정을 팔고 사는 유성 전통 시장에서 어린 시절을 찾는다. 가슴속 깊은 곳에 묻혀 있던 향수를 덤으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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