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명문식 Oct 06. 2020

흐르는 삶

행복하여 웃는 것이 아니라 그냥 웃으면 행복해진다

아기들의 삶을 살펴보면 간단하다. 아기가 100일이 지나면 뒤집기를 한다. 어느 날 아기가 뒤집기를 하자 이를 지켜보던 엄마가 신기하여 손뼉을 치며 기어보라고 소리친다. 아기와 엄마가 무언의 대화를 이어간다.

아기 : “저는 뒤집기도 너무 힘들어요.”

엄마 : “아가야! 이리 오세요.”

아기 : “있는 힘을 다하여 기어가고 있어요.”

아기가 가까이 오자 엄마는 더 멀리 장난감을 옮겨 놓았다.

엄마 : “조금만 더 오세요.”

아기 : “엄마도 기어 보세요. 너무 힘들어요.”

아기는 너무 힘들어 머리를 바닥에 떨군다.     


엎치고 기는 때에 엄마는 감격하고 홀로 서서 한 발짝 걸으면 천하 장군이 된다. 엄마 말 한마디에 힘들어도 아기는 행복하다. 아기가 뒤집기를 하는 과정을 보면 얼마나 열심인지 대견하다. 엄마는 아기의 마음을 안다. 말이 없어도 서로 통한다. 시간이 지나면 거실 끝에서 식탁 아래까지 기어와 고개를 들고 웃는다. 배를 바닥에 붙이고 포복 자세로 군인들이 훈련이라도 하는 것 같다. 아기가 자연스럽게 하나씩 움직이는 행동을 몸에 쉽게 익혀가는 줄 알았는데 엄청난 연습이 필요하였다. 아기들이 있어서 이 세상이 아름답다. 티 없이 맑고 투명한 마음을 가진 아기들보다 고귀한 것은 없다. 이것이 우리 아기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어른들은 자기 아기들의 작은 몸짓 하나에 아름다움과 사랑을 배운다.


아기들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으면 눈물이 범벅되도록 울 때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웃는다. 그들은 속상했던 마음을 오래 담아두지 않는다. 그들은 순수한 영혼의 에너지를 엄마에게 주고, 엄마는 몸과 마음의 사용 방법을 아기에게 가르쳐준다. 아기가 오히려 엄마에게 주는 사랑의 에너지가 더 많다.

아기가 혼자 노는 놀이는 아기의 몸을 균형 있고 튼튼하게 자라게 한다. 재미있는 놀이에 빠져 자연스럽게 많이 움직이면 밀고 당기는 사이에 몸이 저절로 단련되고 몸 전체가 골고루 발달한다. 아기들이 마음껏 움직이며 놀이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고 그들을 지켜보는 것이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유치원 아이들이 경찰서에 체험학습을 나섰다. 그중 한 꼬마가 벽에 붙어 있는 수배자 전단을 보고 물었다.

“경찰 아저씨, 사진 속 아저씨들은 다 나쁜 사람들이죠?”

“그렇지. 만약 길에서 이 아저씨들을 보면 신고하는 거야.”

그러자, 그 말을 듣던 다른 아이가 말했다.

“그럼 저 아저씨들 사진 찍을 때 잡았어야죠.”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눈이 이성적이고 자기 세상을 통해서 할 말도 많다.


사람이 성장하면서 사소한 일에서 큰일에 이르기까지 짜증이 날 때가 있다. 입사 시험이나 입시에서 탈락했을 때, 아기가 계속해서 울 때,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할 때, 휴대전화기가 고장 났을 때, 싸운 사람과 마주할 때, 누군가로부터 괴롭힘을 당할 때, 열심히 했던 일이 무용지물이 될 때 등 짜증의 이유도 많다. 문제는 짜증을 가볍게 생각하며 자주 짜증을 내는 사람도 있고, 상대방에 상처를 주며 상황이 나빠지면 남 탓을 하고, 가족이나 직장 동료나 가까운 사람 등에 짜증을 내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마음먹은 대로 잘 풀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사람은 화가 날 때의 처신에 따라 두 부류로 나뉜다. 아무리 화가 나도 속으로 삭이면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자기반성의 기회로 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을 상대로 화풀이하는 사람도 있다. 불같이 화가 날 때면 침묵이 약이다. 화가 날 때 말을 많이 하면 나중에 후회하고, 그때를 잘 참으면 훗날 추억이 된다. 삶은 즐거운 일도 있고, 괴로운 일도 있기 마련이다. 즐거움은 그 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지만, 괴로운 일은 마음 깊숙이 아픈 상처로 남아 많은 것을 깨닫게 된다. 몹시 화가 나고 도저히 이해되지 않고, 용서되지 않던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사그라져 내가 그때 왜 그렇게까지 화를 내었는지 후회한다. 감정이 격할 때는 한걸음 물러서서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제임스에게 에밀리라는 여자가 찾아왔다. 그녀는 매사에 부정적이었다. 그녀는 누구도 자기에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늘 짜증을 내다보니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남자 친구를 사귀어 데이트도 하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고민 끝에 윌리엄 제임스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에밀리입니다. 박사님께 상담을 받고 싶어 왔습니다.”

“아, 그래요. 좋습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말해 보세요.”

윌리엄 제임스는 에밀리가 매우 힘든 상황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녀가 걸치고 있는 옷이며 머리 스타일이 우중충했기 때문이다. 경험으로 보았을 때 외적으로 문제가 드러나는 여자들은 내면의 상처가 깊었다. 에밀리는 매사에 자신이 없고, 누구도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고 말하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 윌리엄 제임스가 말했다.

“에밀리, 지금부터 내가 하라는 대로 하세요. 내일 옷을 자신이 고르지 말고 매장 직원이 골라주는 것을 구입하고, 미장원에 가서 머리 스타일을 헤어 디자이너가 해주는 대로 바꾸고, 내일 밤 내가 주최하는 파티에 나오세요.”

에밀리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뭐가 달라질까요? 파티에 가는 것을 싫어해요.”

“그래요? 내가 여는 파티는 여느 때 보던 파티와는 다를 것입니다. 내가 에밀리에게 임무를 맡길 거예요. 내일 와서 파티가 잘되도록 나를 도와주세요. 그럴 수 있겠지요?”

윌리엄 제임스는 웃으면서 말했고, 그녀는 파티에 나오겠다고 약속했다. 다음 날, 파티에 참석한 사람 중에 가장 돋보이는 사람은 에밀리였다. 그녀는 멋진 옷과 머리 스타일로 한껏 치장하고 나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녀는 윌리엄 제임스가 부탁한 대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필요한 것이 없는지 물어보고 사람들을 챙겨 주었다. 시간이 지나자 그녀의 얼굴에 즐거움의 빛이 가득했다. 파티가 끝나자 멋진 청년들이 그녀를 데려다주겠다고 앞다투었다. 그날 이후 에밀리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삶에 짜증이 나는 일이 있어도 즐거운 일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 행복하여 웃는 것이 아니라 그냥 웃으면 행복해진다.


누구나 요양병원을 방문해 보면 마음이 어둡다. 그곳에 계신 분들은 집에 갔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가족들은 여기서 조금 더 있으면 집에 가게 해주겠다고 대답한다. 맞벌이는 맞벌이하느라 바빠서, 전업주부도 이런저런 이유가 따로 있다. 그곳에 계신 분들은 집에 가고 싶지만, 가족마다 상황이 조금 더 좋아지면 집에 간다고 말한다. 서운한 얼굴을 뒤로하고 나오는 가족들은 눈물만 흘린다.


맞벌이하는 부부는 거동이 불편한 부모를 화장실에 데려가고, 점심밥을 차려 주고, 기저귀를 갈아 줄 수가 없다. 그래도 요양병원에서는 간병인이 그 모든 것을 대신하여 줄 수 있으니 병원에 계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삶의 기준도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 70대는 건강하면 성공한 것이고, 80대는 본처가 밥을 차려 주면 성공한 것이며, 90대는 전화할 곳이 있으면 성공한 삶이다.


요양병원에 근무하는 어떤 의사가 한 말이다. 그 의사는 요양병원에 면회 온 사람들이 서 있는 가족들의 위치를 보면 촌수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침대 옆에 바싹 붙어 눈물 콧물 흘리면서 이것저것 챙기는 여자는 딸이다. 그 옆에 어색하게 서 있는 남자는 사위다. 문간쯤에 서서 먼 산만 보고 있는 남자는 아들이고, 병실 복도에서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여자는 며느리다. 요양병원에 장기 입원하고 있는 부모를 그래도 이따금 찾아가서 살뜰히 보살피는 사람은 딸이다. 그녀는 준비해 온 밥이며 반찬이며 죽이라도 떠먹인다. 대개 아들들은 침대 모서리에 잠시 걸터앉아 딸이 가져온 음료수 하나 까먹고 이내 사라진다. 요양병원에 있는 부모는 딸 하나가 열 아들보다 낫다.


무슨 일이든지 시작과 끝이 중요하다. 더할 나위 없이 사람의 생도 탄생과 죽음이 중요하다. 미련이 남아 있다는 것은 소중한 사랑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인생은 ‘홀로 왔다, 홀로 가는 것’이고 자신과 맺었던 모든 관계를 끝내고 빈손으로 간다.


어느 노인이 요양병원에서 보낸 편지다.

‘열심히 살 때는 세월이 화살 같다고 하지만 할 일이 없으니 세월이 가지 않네요. 정신이 맑으면 무엇하리오, 자식 많은들 무엇 허리요, 보고 싶은 마음만 더 하네요. 차라리 정신 놓아 버린 저 할머니처럼 세월이 가는지, 자식이 왔다 가는지 자식을 보아도 몰라보시고 그리움도 사랑도 다 기억에서 지워 버렸으니 천진난만하게 하루 세끼 밥이 유일한 낙입니다.’    

이 편지를 보면 돈 없고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거동이 불편한 부모가 되면 자식들에게 짐이 되는 부모다. 그들은 친구가 있어도 마음을 나눌 수 없다. 요양원에는 거동이 불편한 사람, 듣지 못하는 사람,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사람들이 함께 산다. 정신이 맑은 노인이 그 속에 함께 있으면 더 외롭고 하루가 더 길다. 요양원의 시간은 겉으로 그저 덤덤하게 흘러간다. 외로움 속에 해가 뜨고 지는 것조차 상관하지 않는다. 날짜의 개념도 없이 지루한 침대에 외로움을 의지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그리운지 말도 없다. 그저 살아 있음에 살아 있는 침실이다. 계절은 기다리지 않아도 비가 눈으로 바뀐다.


영국의 심리학자 ‘브롬이’는 인생의 4분의 1은 성장하면서 정신 연령과 영적 나이를 승화시키고, 나머지 4분의 3은 늙어가면서 자연 나이와 건강 나이를 채워 보낸다고 하였다. 사노라면 가기 싫어도 가야 할 길이 있고 가고 싶지만 가지 못하는 길도 있다. 인생길은 안 가는 길과 못 가는 길이 있고, 못 보는 길과 보이는 길이 있다.


세월은 멈추지 않지만 삶은 자연 속에 머물고, 어느 날은 길에서 별을 보고, 또 어느 날은 먼 훗날 행복이 올 것이라는 꿈을 꾼다. 우리는 세월이라는 배를 타고 자기 뜻과는 상관없이 종점을 향해 달리고 있다. 잔잔한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배에 우리가 타고 있다. 인생은 아무리 아등바등 살아도 그저 연못 속 작은 물고기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마주 앉아 웃을 수 있으면 그것이 행복이다. 록펠러는 재물이 많아지자 남들이 자기를 보고 재물을 부정한 방법으로 모은 것처럼 생각하지 않을까 고민하였다. 또한, 카네기는 많은 재물은 얻었지만, 슬하에 자식이 없어 고민하였다. 늦게 딸을 얻었지만 반신불수였다. 이들은 부자로 성공했으나 그들만의 고민이 따로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AI와 인간의 공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