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두 달짜리가 감히 큰 그림을 그려봤다
스타트업은 체계적이지 않은 곳이 많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체계적이지 ‘못한’ 것이지만.
스타트업에서는 무엇이든 빠르고 효율적으로 일하는 게 포인트다. 그래서 막 시작하는 스타트업에서 체계적으로 일하기는 참 힘들다. 누군가의 리소스를 투입해서 업무 프로세스를 체계화해야 하는데, 모자라면 모자랐지 남는 리소스는 없기 때문. 그래서 사람들이 처음 합류하면 머릿속엔 물음표투성이가 된다. 나 또한 첫 한 달은 혼란 그 자체였다.
혼란스러운 신입은 당연하게도, 일을 그냥 ‘처리’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방식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정글의 넝쿨을 쳐내 가듯이 일을 하면 앞으로 나아가기는 하지만, 내가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하기는 어렵다. 커리어도 마찬가지다. 할 일이 참 많은 스타트업에서는 눈앞의 일거리를 ‘처리‘하게 되지만, 한 템포씩 쉬면서 나아갈 방향을 찾고 고민하는 것도 중요하다. 사수처럼 날 담당해주었던 선배는 내게 일을 쳐내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조언해 주었다.
나는 첫 달까지만 해도 일을 쳐내듯이 했다. 어쩔 수 없긴 했다. 내 업무를 담당하던 사람들이 각자 OJT(On the Job Training)를 해주다 보니 이리저리 불려 다니기 일쑤였고, 회사와 업무에 대해 학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자 약간의 위기감을 느꼈다. 선배의 우려가 현실이 될까봐. 지금 당장 바뀌지 않으면 습관으로 굳어버릴까 봐. 그래서 나는 바뀌기로 결심했다. 큰 그림을 그리는 동료가 되기로!
내가 생각하는 ‘큰 그림’이란,
1) 지금 당장 내가 하고 있는 업무의 방향성을 잊지 않고,
2) 우리 회사가 나아갈 방향성을 잊지 않고,
3) 내 커리어의 방향성을 잊지 않는 것이다.
첫째, 내가 하고 있는 작은 업무 하나하나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 계속 고민해야 한다. 카드뉴스 하나를 만들 때도 이 마케팅 업무의 단기적인 목표가 무엇인지를 인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보다 상위에 있는 목표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완벽하게 꼼꼼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내 상사가 지시한 일이라고 해서 그대로 따르다 보면 그 사람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는 구멍이 생길 수도 있다. 그 구멍이 사소한 디테일이면 다행이지만, 사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크기라면 문제가 될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아주 초기의 기획 단계에서 피드백을 많이 주고받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모든 멤버가 모든 결정에 동의할 필요도, 그럴 수도 없지만, 적어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명분을 가지고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둘째, 내가 지금 다니고 있는 이 회사가 나아갈 방향성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이건 비단 대표나 C 레벨만이 고민해야 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규모가 작은 스타트업의 특성상 회사의 성패는 나의 커리어에도 직격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당장은 매출이 나지 않아서 수익 올릴 고민만 하다 보면 브랜딩이 부족해서 장기적으로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고, 반대로 고객을 감동시킬 수 있다면 수익은 언제든 날 것이라는 말랑말랑한 믿음만 가지고 일하다가 망할 수도 있다. 적어도 1년 뒤에 회사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보고, 내가 하는 일 하나하나가 그 미래를 실현하는 방향인지 아닌지 계속 고민해야 한다.
셋째, 지금 내가 하는 일이 2-3년 뒤의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 방향인지 고민해야 한다. 누군가가 내게 해준 말이 있다. ‘회사는 나를 책임져주지 않는다.’ 회사를 위해 내가 굳이 희생해야 할 필요는 없다. 내가 아무리 몸과 마음을 바쳐 일해도 내 커리어를 영원히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회사가 필요한 것과 내가 나아가고 싶은 것이 최대한 부합하는 방향으로 가야 모두가 만족스러운 회사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중에 이직/퇴직하고 전 회사 욕하지 말고, 내 업무의 범위나 방향성에 대해서 충분히 논의하는 시간을 가지는 게 좋다. 대표와 일대일로 의논할 수 있는 것, 그게 스타트업의 장점 아니겠는가!
마치 새로 들어온 후배에게 고민 상담 해주듯이 써 내려갔지만, 사실 내가 큰 그림을 잘 그리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워낙 할 일이 많아서 생각할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 오늘도 일하다가 내가 큰 그림을 놓쳤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큰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다. 의식하지 않고서도 큰 그림을 그리게 될 줄 알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주니어에서 벗어나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