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능력, 현실 때문에 포기한 나의 꿈 셋
나는 꿈많은 백수다. 정확하게 말하면, 꿈이 많았던 백수. 고등학생 땐 하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어서 문제였는데(그땐 아는 게 없었으니까), 대학생이 되고 나선 꿈이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이것저것 배우고 싶고 하고 싶은 건 많은데 뚜렷한 목표가 없는 느낌이랄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런 성향 덕분에 지금의 내가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땐 참 막막하기만 했다. 무럭무럭 키워서 꿈을 이루면 될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
내가 대학에 들어와서 가장 처음에 정한 장래희망이자 가장 허무맹랑한 꿈이다. 그땐 마냥 영화가 좋았다. 그래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면 되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꿈에 한 발짝 다가가기 위해 영화 제작 동아리에서 영화를 직접 제작해보기도 했다. 별 기술도 없이 하고 싶다는 열정만으로 만든 학생 영화이지만, 꽤 오랫동안 동아리에 몸담으면서 내 영화 그리고 친구들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런데, 진짜 영화감독이 되려니 꽤 많은 문제가 있었다.
우선 아무도 나를 써주지 않았다. 난 사무실에서 앉아 일하기보단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히며 일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도 나를 써주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지인 버프가 있을까, 해서 얼굴은 모르지만 건너건너 아는 동아리 선배가 일하는 프로덕션에 지원해도 '미안하다, 고된 일이라 여자는 힘들다'는 말뿐이었다. 내가 살면서 처음 직면한 성차별이었다. 그전까진 여자라서 안 된다는 말을 자주 들어보진 않았으니까. 꽤 많은 거절을 마주한 나는 점점 영화계가 '배우가 아닌 이상 여자는 일할 수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장에서 스태프로 일해보아야 경력을 쌓고 인맥을 만들어 일을 할 텐데, 첫 스텝부터 꼬인 것이다.
그렇지만 이 꿈을 포기한 결정적인 이유는 영화계에 만연한 성폭행 때문이다. 몇 년 사이에 미투 운동으로 알려지기 전에도 나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성차별에 둔감한 제작 환경, 남자 스탭의 성희롱, 그리고 끔찍한 성폭력. 그런 이야기를 듣다보면 가지도 않은 업계이지만 정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비겁할지 몰라도 나는 어떤 꿈이든 그런 환경에선 이루고 싶지 않았다. 맞서 싸워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왜? 나는 투사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냥 일을 하고 싶은 것인데? 그래, 어쩌면 내 꿈이 그렇게 간절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일찌감치 내 능력의 한계를 깨달은 것일지도. 뭐가 어찌 됐든, 영화 현장의 환경 때문에 꿈을 저버린 여성들이 많은 건 사실이다.
영화감독을 포기한 사람들은 주로 이 테크를 탄다. 비록 영화는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는 '영상 콘텐츠'를 만들 수 있고, 게다가 영화계와는 달리 안정적인 월급이 나오니까. 나도 그래서 잠시 PD의 꿈을 꾸었다. 한겨레 센터에서 여는 방송 PD 준비반도 시험 삼아 들어가기도 하고. 그런데 준비하면 할수록 내가 부족하다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방송국 PD는 미친 경쟁률을 자랑한다. 고시처럼 되기 힘들다고 '언론 고시'라는 말이 붙었다는 것쯤은 다들 들어봤겠지. 우선 그런 경쟁률 속에 뛰어드는 것 자체가 너무 부질없다고 느껴졌다. 게다가 그런 경쟁률을 뚫고 PD가 된 사람들은 정말 번뜩이는, 소위 크리에이티브한 사람들이었다. 내가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창의력과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나는 내가 '크리에이티브한' 사람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거기서 최고가 될 자질까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내가 지금까지 방송 하나에만 매달리며 공부하고 쌓아온 사람들과 경쟁한다? 미래가 뻔히 보이는 결과였다. 그래서 현실을 인정하고 포기하기로 했다. 물론, 방송 상식처럼 의미 없어 보이는 공부를 하는 것도 싫었고.
나는 심리학을 복수 전공했다. 남들보다 뒤늦게 시작한 탓에 본 전공을 대부분 이수한 뒤에 심리학 과목을 수강하다 보니 시간표는 심리학 전공으로 빽빽했다. 그런데 내가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본전공(=영어영문학)과는 다르게 세상 재밌고 행복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이해하고, 인간에 대한 실험을 바탕으로 쓴 논문을 읽으며 나 자신과 타인을 파악하는 것. 심리학은 공부 양이 많기로 유명하지만, 난 정말 즐겁게 공부했다. 내가 저학년 때 심리학의 재미를 알았더라면 아예 전공을 바꾸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그래서 진지하게 심리학 대학원에 진학하는 걸 고민했었다. 솔직히 학점이 그리 좋지는 않았고 누가 봐도 뛰어난 인재까진 아니었지만, 그냥 심리학을 더 깊이 공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심리 상담을 받고 또 공부하면서 상담의 매력에 푹 빠져 상담가가 되어볼까 고민도 했고, 과학적 분야라서 문과생이 접근하기엔 어렵지만 꽤 재미있고 또 미래가 유망한 인지 심리학을 공부해볼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대학원에 가려면 당연히 돈이 든다. 그리고 심리학은 돈이 많이, 아주 많이 든다. 나처럼 뚜렷한 목표 없이 심리학 대학원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았는지, 한 교수님은 상담가가 되는 루트를 소개해주셨다. 나는 그 날 강의실 맨 뒷자리에 앉아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무거워지는 학생들의 어깨와 숙연해지는 분위기를 느꼈다. 한국에서 박사과정을 통과하려면 어림잡아 6~7년이 걸리고, 미국에선 7~8년 이상 걸린다. 당연히 시간이 지날수록 돈은 더 많이 들고, 미국 유학은 (내겐) 천문학적인 숫자가 들어갔다. 우리 집은 그런 돈을 감당할 수 있는 가정은 아니었고, 나도 이 공부를 위해 가정을 희생시키고 싶진 않았기에 대학원을 포기했다. 세상엔 좋아하는 마음만으론 불가능한 것이 있다는 걸 명확히 깨달은 날이었다.
글이 길어졌다. 내가 포기한 이유에 대해서 구차한 변명을 하고 싶어서인가…. 이번 편은 제목에도 쓰여 있듯이 '이상 편'이다. 대학교 저학년 때까지만 해도 아직 가능성이 풍부한 때이니, 조금은 허무맹랑하고 현실적이지 않은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다음 글은 '현실 편'이 될 예정이다. 고학년이 되면서 서서히 마주한 현실 세계에서는 어떤 꿈을 꾸고 또 포기했는지 이야기해 볼테니, 기대해주시길!